‹ 목록으로 야, 우리 왜 어려졌어?

2화

가까이 다가갈수록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가 귓속까지 울려 왔는데, 그건 두려움이라기보단 낯선 몸이 아직 감정과 박자를 맞추지 못해서 내는 조율이었다. 마흔한 해를 살아온 정신이 열다섯 살짜리 심장을 빌려 쓰고 있으니, 이 심장은 아직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제멋대로 뛰어대는 것이다. 발밑에서 풀잎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어딘가 축축한 흙냄새와 함께 희미하게 쇠붙이 냄새 같은 것이 코끝을 스쳤는데, 그게 어디서 나는 냄새인지는 알 수 없었다. 쓰러진 형체는 짙은 남색 교복을 입은 소녀였고, 치마 자락이 바람에 흩날리며 풀 위에 널브러져 있었는데, 나는 무릎을 꿇고 그 어깨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어이, 정신 좀 차려 보게." 마흔한 해 묵은 말투가 열다섯 살짜리 목으로 흘러나오는 게 스스로도 어색해서 나는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목소리를 낼 때마다 성대가 낯설게 울려서, 마치 남의 성대를 빌려 노래방에서 처음 마이크를 잡은 기분이었다. 소녀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다가 서서히 열렸는데, 그 안에 담긴 눈동자가 나를 향해 초점을 맞추기까지는 몇 초쯤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눈동자 색이 짙은 갈색이었고, 눈가에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기가 남아 있는 것도 보였다. "...누구세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고, 나는 그 목소리의 톤에서 어딘가 익숙한 무언가를 느꼈다. 정확히 말하면, 익숙한데 낯선, 그 미묘한 경계에 걸린 감각이었다. 소녀는 몸을 일으키려다 자기 손을 내려다보고는 흠칫 굳어 버렸다. "이거 뭐야, 내 손이 왜 이래." 당황한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그녀는 자기 손등을 몇 번이나 뒤집어 보았고, 손가락을 폈다 접었다 하면서 마치 처음 보는 물건을 다루듯 신기해했다. 나는 그 반응을 보면서 속으로 '나만 이런 게 아니었군' 하는 안도와 동시에, 저 얼굴이 어딘가에서 본 얼굴이라는 확신이 점점 뚜렷해졌다. 동그란 눈매, 약간 치켜올라간 눈썹 끝, 웃을 때 유독 깊어지던 왼쪽 볼우물. 심지어 왼쪽 귓불 아래 작은 흉터까지 그대로였는데, 그건 초등학교 때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에서 떨어져 생겼다고 본인이 술만 마시면 자랑하던 흉터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네, 혹시 이름이 차은서인가?" 소녀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되물었다. "그걸 어떻게... 도윤이니? 이도윤?" 그 순간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는데, 열다섯 살이었던 나와 은서가 고등학교 음악부 연습실에서 함께 스케일 연습을 하던 기억이 갑자기 눈앞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 곰팡이 냄새 나던 방음벽, 은서가 도, 레, 미를 부르다가 음이 갈라지면 깔깔대며 웃던 그 웃음소리까지. 그리고 그 후로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나는 마흔한 살의 몸으로 어딘가에서 죽었고, 저 여자는 나보다 스물여섯 해는 젊은 얼굴로 어딘가에서 죽었을 텐데, 지금 우리는 나란히 열다섯 살짜리 몸을 하고 이름도 모를 풀밭 위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인생이란 참,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을 놀리는 재주가 있구나 싶었다. "맞다니까, 나야. 그런데 자네가 왜 여기서 이런 모습으로 누워 있는 건지 나한테 설명해 줄 수 있겠나?" 내가 능글맞게 웃으며 묻자, 은서는 자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신음을 흘렸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오는 숨소리가 점점 빨라졌고, 어깨가 들썩이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모르겠어, 나 분명히... 도로에서, 신호 대기 중에... 트럭이..." 말을 잇지 못하고 몸을 떠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안정시켰다. 손바닥에 닿는 어깨가 가늘고 작아서, 마흔 넘어 알던 그 단단한 어른의 몸과는 전혀 다른 감촉이었는데, 그 이질감이 오히려 지금 이 상황을 실감 나게 만들었다. "괜찮아, 진정하고. 우리 지금 살아 있는 게 아닌 것 같으니까 그렇게 놀랄 것도 없어. 나도 방금 죽었고 자네도 방금 죽었으면, 여긴 죽은 사람들이 오는 곳이라는 결론 아닌가." 최대한 여유로운 말투로 던진 말이었지만, 속으로는 나 역시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 있는 걸 억누르는 중이었다. '마흔한 해 살고 나서 이런 상황에 던져지다니, 인생이란 참 성실하게 사람 뒤통수를 치는군.' 그나마 다행인 건, 죽어서도 아는 얼굴을 만났다는 사실이었다. 이게 다행인지 재앙인지는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지만. 은서는 몇 번 숨을 몰아쉬다가 겨우 진정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하늘을 훑고, 나무들을 훑고, 다시 내 얼굴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 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낯선 세상을 받아들이는 데는 저마다의 속도가 있는 법이니까. 하늘은 이상하게도 노을도 아니고 낮도 아닌, 어딘가 붉은빛과 회색빛이 뒤섞인 색이었고, 나무들의 잎사귀는 초록이 아니라 옅은 청색을 띠고 있었는데, 그게 이 세상이 원래 그런 색인지 아니면 우리 눈이 아직 이곳의 빛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은서가 갑자기 자기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표정이 이상하게 굳었다. "이건... 뭐지." 그녀의 손에는 낡고 색이 바랜 가죽 케이스가 쥐어져 있었는데, 손잡이 부분이 닳아서 반질반질했고 모서리 곳곳에 스크래치가 나 있었다. 크기는 대략 바이올린 케이스보다는 작고 클라리넷 케이스보다는 큰 정도였는데, 가죽 표면에 무슨 문양인지 알 수 없는 얇은 은색 선이 새겨져 있었고, 그 선이 빛을 받을 때마다 미묘하게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케이스를 눈여겨보며 물었다. "그건 원래 자네가 들고 있었던 건가?" 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케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모르겠어. 사고 직전엔 이런 거 없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까 손에 쥐어져 있었어."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면서 케이스를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는데, 그녀 자신도 그 케이스를 놓아야 할지 계속 쥐고 있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 눈치였다. 그 말과 동시에, 케이스 안에서 낮고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는데, 마치 그 안에 든 무언가가 스스로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었지만, 진동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걸 보니 착각이 아니었다. 마치 심장이 뛰는 박동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케이스 표면이 아주 조금씩 떨렸다. 은서의 얼굴이 다시 새파랗게 변하는 걸 보며, 나 역시 등골을 타고 오르는 서늘함을 느끼면서도, 그 케이스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은서야, 그거 좀 내려놓아 보게." 내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지만, 은서는 손이 굳어버린 것처럼 케이스를 놓지 못했다. "안 놓아지는데... 손이 안 움직여." 그녀의 말에 나는 손을 뻗어 그 케이스를 함께 잡아보려 했는데, 손끝이 케이스 표면에 닿는 순간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짜릿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고,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뺐다. "뭐야, 방금 그거." 내가 손끝을 털며 중얼거리자, 은서는 여전히 케이스를 쥔 채로 나를 쳐다보았는데, 그 눈빛에는 두려움과 함께 이상한 확신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도윤아, 나 이거... 열어봐야 할 것 같아." 그녀의 목소리가 아까와는 다르게 이상하게 차분해져 있었고, 나는 그 변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죽어서 낯선 곳에 떨어졌는데 처음 손에 쥐어진 물건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사람을 잡아끄는 것 같다면, 그건 대체로 좋은 신호가 아니었으니까. 케이스에서 흘러나오는 진동이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고, 은서의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지게 서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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