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파괴된 영혼의 여신 엄마

2화

눈을 떴을 때 나는 다시 아기였다. 정확히는 그런 감각만 남아 있었다. 몸이 작고, 손발이 짧고, 시야가 낮았다. 기억은 소연의 것을 다 갖고 있었지만, 몸은 완전히 새것이었다. 손가락을 움직여보려 해도 뜻대로 안 됐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 줄 몰랐다. 서른 몇 해를 살아본 정신이 아기 몸에 들어가면 이런 느낌이구나, 나는 그렇게 태평하게 감상했다. 며칠, 아니 몇 주가 그렇게 흘렀다. 시간 감각이 뒤죽박죽이었다. 눈을 뜨면 밝았고, 눈을 감으면 어두웠고,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다. 누가 나를 안아 올렸는지, 누가 나를 씻겼는지,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도 없었다. 다행히─그런 표현을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그 시간을 다 겪지는 않았다.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사이 몸이 훌쩍 자랐다. 아마 신이라는 존재는 성장 속도가 다른 모양이었다. 인간으로 치면 태어나서 사춘기까지 며칠 만에 지나온 셈이니, 이건 성장이 아니라 거의 편집이었다. 정신을 제대로 차렸을 땐, 나는 어느 신전 같은 곳의 계단 위에 서 있었다. 열여섯이나 열일곱쯤 되어 보이는 몸이었다. 다리가 길었다. 팔도 길었다. 서른 넘어서 이런 몸을 갖게 될 줄은 몰랐는데, 죽으니까 그것도 가능하구나 싶었다. 거울을 본 적은 없지만 물웅덩이에 얼핏 비친 얼굴이 낯설었다. 금발. 벽안. 소연이었을 땐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색이었다. 머리카락을 한 가닥 집어 눈앞으로 가져와 봤다. 빛에 비치니 색이 옅어졌다가 다시 짙어졌다. 신기했다. 이런 걸로 신기해할 처지인가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예쁘네." 나는 혼잣말했다. 목소리도 낯설었다. 어리고 맑았다. 원래 내 목소리보다 한 톤은 높았다. 성우가 더빙해준 것 같은 위화감이 들었다. 신전 아래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확히는 말이 아니라 소리였다. 웅웅거리는 소음, 발소리, 뭔가를 두드리는 듯한 규칙적인 리듬. 나는 이 세계의 언어를 모르는 채로 떨어졌지만, 이상하게도 뜻이 그대로 머릿속에 들어왔다. 여신이라는 자리에 붙어오는 편의 기능인 듯했다. 다행이다. 통역 앱 하나 안 켜도 되는 삶이라니, 그건 확실히 이득이었다. 살아 있을 때는 영어 이메일 하나 쓰는 데도 번역기를 세 번씩 돌렸는데. 계단 밑에서 한 소년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 검은 눈. 옷은 낡았지만 검을 쥔 손에는 흠집 하나 없었다. 열일곱이나 열여덟쯤 됐을까. 표정이 없었는데, 그게 무뚝뚝해서 없는 건지 원래 그런 얼굴인지 구분이 안 갔다. 자세는 곧았다. 검을 든 게 처음이 아닌 사람의 자세였다. "당신이... 새로운 신입니까." 소년이 물었다. 존댓말이었지만 어딘가 시험하는 투였다. "그런가 봐요."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속으로는 완전히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 저 나이대 애를 앞에 두고 나는 지금 뭘 해야 하는 거지. 인사를 해야 하나, 자기소개를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신답게 위엄 있게 서 있어야 하나. 계단 위에서 팔짱을 껴볼까 했는데 그건 너무 티가 날 것 같아서 그만뒀다. "확인할 게 있습니다." 소년이 검 손잡이를 살짝 쥐었다. 경계하는 손짓이었다. "다섯 번째 신은 취임 직후 가짜였습니다. 세계를 더 망가뜨리고 사라졌습니다." 그 말투가 이상하게 익숙했다. 새로 온 세입자를 의심하는 관리인 같았다. 계약서도 안 보고 보증금 이야기부터 꺼내는 관리인. 나는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참았다. 지금 여기서 웃으면 그것도 의심받을 것 같았다. "확인은 어떻게 하는데요?" "신전이 반응합니다. 진짜라면." "반응 안 하면요?" "그때는 제가 처리합니다." 도현이 대답했다. 검 손잡이를 쥔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말투는 여전히 존댓말이었는데, 뜻은 전혀 존댓말이 아니었다. 마침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발밑의 대리석이 부드럽게 빛나기 시작했다. 빛은 계단을 따라 퍼졌고, 신전 전체가 옅은 금빛으로 물들었다. 계단 틈새에 낀 먼지까지도 다 보일 정도로 밝아졌다. 나는 딱히 뭘 한 게 없는데, 그냥 서 있었을 뿐인데 그랬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손쉬웠다. 소년의 표정이 처음으로 조금 흔들렸다. 눈이 살짝 커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검을 쥔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게 보였다. "...진짜네요." 그는 검을 검집에 다시 꽂았다. 절그럭. 그 소리가 신전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도현입니다." "설아예요." 나는 계단을 내려가며 손을 내밀었다. 그는 그 손을 잠깐 쳐다보다가,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자기 손을 슬쩍 뒤로 뺐다. 그러곤 대신 고개만 숙였다. 각도가 딱 정해진 것처럼 정확했다. 몇 번이나 연습한 인사 같았다. 악수 문화가 없는 모양이다. 나는 그냥 손을 내렸다. 민망함을 감추려고 손을 옷자락에 슬쩍 문질렀는데, 그 옷자락이 신을 상징하는 예복 같은 거라면 이것도 실례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여기, 신의 자녀라는 게 저 말고 더 있나요?" 내가 물었다. "있습니다. 지금은 다들 임무 중이라 신전에 없습니다." 도현이 대답했다. "저는 이번 취임식을 지키러 남았습니다." "몇 명이나 있는데요?" "셋입니다. 원래는 더 많았습니다." 원래는 더 많았습니다. 그 한마디에 붙은 무게가 느껴졌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첫날부터 다 캐물었다가 이 애가 입을 닫아버리면 곤란했다. "취임식이라는 게 있어요?" "방금 하신 게 취임식입니다." "이렇게 간단해요?" "신께서 진짜라는 걸 신전이 알아보는 것 외에 다른 절차는 없습니다." 도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 이상을 바라셨습니까." "아니요. 그냥," 나는 계단을 내려다봤다. "간단해서요." 그 말에 나는 잠깐 계단을 내려다봤다. 이렇게 간단하게 신이 되어버린 게 웃긴 동시에, 어딘가 서글펐다. 살아 있을 때는 뭘 하나 결정하려면 서류가 몇 장씩 필요했는데, 죽어서는 계단 하나 내려가는 걸로 세계 하나를 책임지는 자리에 앉는다. 도장도 안 찍고, 서명도 안 하고. 인수인계서 한 장 없이 세계를 떠맡는 게 이렇게 가벼울 일인가. "멸망까지 얼마나 남았어요?"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 도현이 잠깐 나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뭔가 놀란 기색이 섞여 있었다. 검을 쥔 손이 아주 살짝 움찔했다. "보통은 그런 걸 취임 첫날 묻지 않습니다." "저는 원래 좀 급한 성격이라서요." "...세 계절 안입니다. 학자들의 계산으로는." 세 계절.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다. 살아 있을 때 나는 세 계절이 지나가는 걸 몇 번이나 무심하게 넘겨보냈던가. 봄이 왔다가 가는 줄도 모르고 야근을 했고, 여름이 갔는지도 모르고 장례식장 냉장고를 정리했다. 이번엔 그럴 수 없다는 게 확실했다. 이번엔 세 계절이 곧 마감 기한이었다. "학자들이라니, 여기 그런 것도 있어요?" "있습니다. 신전 지하에 있습니다. 나중에 안내하겠습니다." "좋아요." 나는 말했다. "그럼 저부터 파악해야겠네요. 이 자리가 정확히 뭘 하는 자리인지." 도현이 나를 신전 안쪽으로 안내했다. 걷는 동안 그는 말이 없었다. 나도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대신 주변을 봤다. 신전은 낡았고, 곳곳에 금이 갔고, 기둥 몇 개는 아예 부서진 채 방치돼 있었다. 바닥에 깔린 대리석도 반쯉은 깨져서 색이 다른 돌로 대충 메워져 있었다. 다섯 번의 멸망을 겪은 건물이라기엔 그럭저럭 서 있는 게 용해 보였다. 이 정도면 리모델링이 아니라 재건축이 필요한 수준이었다. "신전이 이 상태인 게, 다섯 번째 신이 가짜여서인가요?" 내가 물었다. "그것도 있고," 도현이 잠깐 걸음을 멈췄다. "신의 자녀들 수가 줄어서입니다. 힘을 나눠줄 신이 없으면, 자녀들도 힘을 잃습니다." "저 지금은 힘이 있어요?" "모르겠습니다." 그가 정직하게 대답했다. "확인해봐야 압니다." 그 순간 이상하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영조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 조각난 영혼은 나눠줄 때마다 아플 거라는 말.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낮고 건조한, 그런데도 어딘가 진심이 담긴 목소리. 그게 지금 여기서 무슨 뜻이 될지, 아직은 짐작이 안 갔다. 조각날 영혼이라는 게 지금 이 몸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말하는 건지도. "그거," 나는 말했다. "확인해봐요." 도현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방금까지의 무표정이 살짝 갈라졌다. 저 표정은 예상 못한 대답을 들었을 때 나오는 얼굴이었다.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요." 나는 대답했다. "저는 이미 한 번 죽어봤거든요." 그 말에 도현의 표정이 처음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뭔가 알아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아예 못 알아들은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눈썹이 살짝 좁아지고, 입이 반쯉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뭐라고 되물으려다 만 얼굴이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신전이 반응했잖아요. 가짜가 아니라는 뜻이면, 저 말도 진짜라는 뜻이겠죠." 도현은 잠깐 나를 쳐다보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곤 천천히 검을 뽑았다. 스릉. 얇고 낮은 소리가 신전 안을 훑고 지나갔다. 검 끝이 내 손끝을 향했다. 나는 손을 뒤로 빼지 않았다. 도망칠 곳도 없었고, 도망칠 이유도 딱히 없었다. 어차피 이미 한 번 죽어봤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으니까. 신전 안쪽 깊은 곳에서, 낮고 무거운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그 진동은 발끝에서 시작해 무릎, 허리, 어깨까지 차례로 밀고 올라왔다. 기둥이 흔들리는 것도 아닌데, 공기 자체가 울리는 느낌이었다. 도현의 눈이 검 끝과 내 손끝 사이를 오갔다. 그 짧은 순간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이번에도 별일 없이 지나갈지, 아니면 뭔가 터질지. 그 답을 나도, 도현도, 아직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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