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연회장으로 이어지는 계단 앞에 선 서은은 잠시 숨을 고르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샹들리에의 황금빛이 대리석 바닥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그 빛 아래로 오간 대화들이 낮게 웅웅거리며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계단의 대리석은 차가웠고, 그 차가움이 발끝을 타고 올라와 그녀의 무릎께에서 멈추는 듯했다. 그녀는 손끝으로 드레스의 옷자락을 한 번 매만졌는데, 그 파란 천이 촛불에 반사되어 마치 물결처럼 흔들렸다. 이 옷을 고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던가. 짙은 자주색이 유행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서은은 오히려 옷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파란 천을 꺼내 들었다. 남들과 같아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눈에 띄어 미움받는 쪽이 나을지도 몰랐다.
"아가씨."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리사 박도식이었다. 그는 손에 작은 은쟁반을 들고 있었는데, 그 위에는 붉은 색이 도는 작은 유리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병 속의 액체는 촛불에 흔들릴 때마다 핏빛으로 반짝였다가, 이내 다시 옅은 붉음으로 가라앉았다.
"이건 뭔가요." 서은이 물었다.
"장미향유입니다." 박도식이 옅게 웃으며 답했다. "오늘 같은 날엔, 향기도 무기가 될 수 있지요."
서은은 그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가, 그 눈빛 속에 담긴 진심을 알아채고 옅게 웃었다. 저택 안에서 그녀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무언가를 내어주는 사람은 드물었고, 박도식은 그 드문 사람 중 하나였다. 부엌에서 몰래 만들었을 것이 분명한 그 작은 병 하나가, 그녀에게는 어떤 값비싼 보석보다도 무겁게 느껴졌다.
"고마워요." 그녀가 말했다.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가 답했다. "저는 그저, 아가씨가 오늘만큼은 주인공이셔야 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 말이 가슴 한켠을 데우는 것을 느끼며, 서은은 향유를 목덜미에 살짝 발랐다. 손끝에 묻은 기름이 서늘하다가도 곧 살갗에 스며들며 온기로 바뀌었고, 은은한 장미향이 퍼지자 그녀는 어깨를 펴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발끝이 계단의 끝에 닿을 때마다 심장이 함께 뛰었다.
연회장에 들어서는 순간 몇몇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파란 드레스는 그날 유행하던 짙은 자주색과는 확연히 다른 색이었고, 그 대담한 선택이 오히려 사람들의 눈길을 붙잡았다. 부채로 입가를 가린 부인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고, 몇몇은 노골적으로 그녀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었다.
"저 아가씨가 권 자작의 장녀인가요?" 누군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꽤 다르게 보이는군요."
"항상 뒷방에만 있던 아이 아니었나요." 다른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저런 색을 고를 줄이야."
그 말들은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경계가 모호했으나, 서은은 그 애매함을 오히려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느 쪽이든,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눈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었으니까.
서은은 그 시선들을 온몸으로 느끼며,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이 배경이 아니라 중심에 서 있다는 감각을 맛보았다. 그것은 낯설고도 짜릿한 감정이었는데, 동시에 그 감정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발끝에서부터 스며 올라왔다. 열다섯 해를 살아오면서 그녀는 늘 병풍처럼 존재했다. 자작가의 응접실에서도, 가족들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서은은 있어도 없는 듯한 존재였다. 그런데 오늘, 이 순간만큼은 사람들의 눈동자가 그녀에게로 모여들고 있었다.
*이 기분을, 잊지 말아야 해.*
연회의 주최자인 자작부인이 다가와 형식적인 축하의 말을 건넸다. "생일 축하한다, 서은아." 그 목소리에는 온기가 없었다. 그것은 예의라는 이름의 껍데기였을 뿐, 그 안에 진짜 애정은 담겨 있지 않았다. 자작부인의 시선은 서은의 얼굴이 아니라 드레스의 색에 잠시 머물렀다가, 곧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서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이제는 그 온도차마저 익숙해서 아프지 않은 척할 수 있었다. 아니, 아프지 않은 척하는 것도 이제는 습관이 되어, 진짜로 아픈지 아닌지조차 헷갈릴 지경이었다.
곧이어 몇몇 귀족 부인들이 다가와 선물을 건넸다. 은으로 세공된 리본핀, 작은 보석이 박힌 반지, 그리고 금화가 담긴 작은 주머니까지. 서은은 그것들을 받으며 예의 바르게 감사를 표했으나, 그 손끝에서는 미세한 떨림이 계속되고 있었다. 처음으로 받는, 자신만을 위한 것들이었다. 반지의 보석이 촛불에 반짝일 때마다, 서은은 그것이 정말로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몇 번이고 되새겨야 했다.
"이런 걸 받아본 게 처음이라서요."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는데, 곁에 있던 부인 하나가 그 말을 듣고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다시 무심한 얼굴로 돌아갔다. 동정도 관심도 아닌, 그저 지나가는 감정의 파편일 뿐이었다.
"서은 아가씨." 박도식이 다시 다가와 낮게 속삭였다. "오늘은 반드시 웃으셔야 합니다. 웃는 얼굴이 가장 강한 무기니까요."
"왜 그런가요." 서은이 되물었다.
"슬픈 얼굴은 동정을 부르지만, 웃는 얼굴은 질투를 부르지요." 박도식이 쟁반을 다시 품에 안으며 답했다. "그리고 질투는, 사람들이 아가씨를 진짜로 존재하는 사람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서은은 그 말에 옅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지는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으나,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연회장의 주인공처럼 보였다. 악단의 현악기 소리가 은은하게 깔리고, 촛불 그림자가 대리석 바닥 위로 길게 늘어졌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잔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는 장미향이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악단의 선율이 바뀌며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무대 쪽으로 모여들 무렵, 연회장 입구 쪽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웅성거림에 가까웠던 소리가, 점점 또렷한 언성으로 바뀌어갔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급하게 대리석 바닥을 두드렸고, 뒤이어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은은 그 소리의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는데, 그 순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방금까지 그녀를 감쌌던 장미향이, 어느새 다른 냄새—차갑고 날카로운 무언가—에 밀려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손끝에 쥐고 있던 반지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고, 서은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