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두 번째 생일, 되찾은 장미

2화

권서은이 응접실 문턱을 넘어선 것은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저택 전체가 이미 잠들어 있었으나 이 방만은 홀로 깨어 촛불의 노란빛을 벽에 흔들리게 하고 있었고, 그 빛은 마치 이 방에서 벌어질 일을 미리 알고 있다는 듯 불안하게 일렁였다. 그녀의 옷자락에는 아직도 마르지 않은 흙과 꽃잎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오늘 저녁 짓밟힌 꽃다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던 시간의 흔적이었다. 흙물이 스민 자리마다 옷감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지만 서은은 그것을 갈아입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이 자리로 불려 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등을 곧게 세운 채 권도현의 앞으로 걸어가는 그 걸음걸이는 담담했으나, 그 담담함 속에는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무언가를 억지로 붙들고 있는 긴장이 서려 있었다. 손끝이 조금씩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 손을 마주 잡아 소매 안으로 숨겼다. "권서은." 권도현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방식에는 어떤 예의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의자에 깊이 몸을 묻은 채 팔걸이를 손끝으로 두드리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규칙적으로 방 안의 정적을 갈랐다. "오늘 밤 벌어진 일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보아라." 서은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낮고 정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준비한 꽃다발이 짓밟혔습니다. 저 또한 그것이 왜 그리되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자네의 것이었다는 그 사실이, 오히려 자네를 의심하게 만든다는 것을 모르는가." 권도현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그 안에는 이미 결론을 내려놓은 자의 여유가 배어 있었다. 그는 서은의 얼굴을 살피듯 눈을 가늘게 좁혔는데, 그 시선은 마치 먹잇감의 흠집을 찾는 사냥꾼의 것과 닮아 있었다. 서은의 턱이 아주 미세하게 굳어지며 이가 맞물리는 소리가 안으로 삼켜졌다. 억울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그녀는 그것을 밖으로 밀어내지 않았다. 밀어내는 순간 모든 것이 자신에게 더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그녀는 오래전부터 배워온 사람이었다. 이 저택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곧 약점을 내어주는 일과 같았다. "제가 무엇 때문에 제 손으로 준비한 것을 짓밟겠습니까." 그녀가 되물었다. 그 물음은 반문이었으나 어딘가 애원처럼 들리기도 했다.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그녀는 그 떨림을 곧바로 눌러 삼켰다. "모르지." 권도현이 짧게 내뱉었다. "사람의 속을 누가 다 안다던가. 억울함을 가장하는 것도, 진짜 억울한 것도, 겉으로는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는 자리에서 상체를 조금 앞으로 기울이며 서은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대공가에서 보낸 그 꽃다발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는 자네도 잘 알 것이다. 그것이 짓밟혀 발견된 자리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가 자주 지나다니는 뒤뜰의 길목이었다는 것도." "그 길목은 이 저택의 하인들 대부분이 지나다니는 길입니다." 서은이 대답했다. 목소리에는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으나, 그녀는 자신이 이 순간 얼마나 위태로운 자리에 서 있는지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권도현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최문석에게로 돌리며 물었다. "최 집사, 자네는 아직도 이 아이를 감쌀 생각인가." 최문석은 방 한쪽 구석에서 그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서은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분명 애틋함이라 부를 만한 것이 스쳐 지나갔으나, 그 밑바닥에는 서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오래된 감정의 잔재가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오래된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 눈빛의 깊이는 짐작할 수 없었다. "소인은 그저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 그가 말했다. 목소리는 낮고 절제되어 있었으나, 방 안의 무거운 공기를 가르는 데는 충분했다. "서은 아가씨는 그날 오후부터 저녁까지 소인의 눈앞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벌어진 일을, 있던 자리에서 벌인 것처럼 말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 말은 서은을 변호하는 듯했으나, 최문석의 목소리 끝에는 미묘하게 날이 서 있는 억양이 남아 있었다. 마치 진실을 말하는 동시에, 그 진실 안에 자신만 아는 다른 진실을 슬쩍 끼워 넣는 것처럼. 그 억양의 미묘함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이 방 안에 아무도 없었다. 권도현은 잠시 못마땅한 듯 입술을 씰룩이다가, 팔걸이를 두드리던 손끝을 멈추었다. 침묵이 방 안을 가득 메웠고, 그 침묵 속에서 촛불의 심지가 타들어가는 소리만이 유일하게 살아 움직였다. 그는 그 정적을 한참 견디다가, 결국 손을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이만하지." 그가 말했다. 몸을 일으키는 그의 동작에는 귀찮음과 경멸이 뒤섞여 있었다. "하나 이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대공가에서도 이 일을 그냥 넘길 리 없으니. 자네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짓이라면, 그자를 찾아내는 것도 자네의 몫이 될 것이야. 이 집안의 얼굴에 먹칠을 한 자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 말속에는 은근한 경고가 숨어 있었다. 마치 이 일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 책임의 일부는 이미 서은의 어깨 위에 얹혀 있다는 것을 못박듯이. 그가 방을 나서자 문이 무겁게 닫히는 소리가 울렸고, 방 안에는 서은과 최문석, 그리고 흔들리는 촛불만이 남았다. 서은은 그제야 어깨의 힘을 조금 늦추었으나,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근처 탁자를 손끝으로 짚었다. "고맙습니다, 최 집사님." 그녀가 낮게 말했다.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지만, 그 진심 아래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피로가 짙게 배어 있었다. 최문석은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 말투에는 미묘한 서늘함이 섞여 있었다. 서은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옷자락을 정리하며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흙물이 밴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 속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최문석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낮게 중얼거렸다. *당신의 어머니도, 그날 밤 그렇게 걸어 나갔었지.* 그 말은 소리가 되지 못한 채 그의 입 안에서 흩어졌고, 서은은 그것을 듣지 못한 채 어두운 복도로 사라졌다. 그녀의 발소리가 복도의 어둠 속으로 하나씩 잦아들었고,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최문석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손끝이 무의식적으로 옷깃을 매만졌다. 오래전, 이 저택의 어느 복도에서 마주쳤던 또 다른 여인의 뒷모습이 지금 서은의 그것과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그 여인 역시 등을 곧게 세우고, 고개를 숙이지 않은 채 이 저택을 걸어 나갔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최문석은 그녀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는데, 그 시선 속에는 존경과 원망이 뒤섞인, 좀처럼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이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 촛불이 마지막으로 크게 한 번 흔들리며 그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를 새겼다가, 다시 잔잔해졌다. 그 그림자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가 오랫동안 감추어온 어떤 결심의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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