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저택의 응접실에는 촛농이 흘러내린 은촛대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고, 그 흔들리는 불빛이 벽에 걸린 초상화들의 눈매를 유난히 음험하게 만들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늦은 밤의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으나, 방 안의 공기는 오히려 그 어둠보다 더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듯했다. 권도현 자작은 팔걸이의자에 등을 깊이 묻은 채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짚고 있었는데, 그 손가락이 멈추지 않고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이 못마땅한 심경을 대신 말해주는 듯했다. 이따금 그의 시선이 벽에 걸린 죽은 아내의 초상화로 향했다가 다시 무릎 꿇은 자들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왕복하는 눈길 속에는 이미 판결을 내려놓은 자의 지루함이 배어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시종 두 명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고, 그 뒤편 어둑한 벽 쪽에는 초로의 집사 최문석이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응접실의 벽시계가 자정을 향해 느릿하게 다가가는 소리만이 정적을 갈랐고, 그 초침 소리마저 이 방 안에서는 유난히 크게 울리는 듯했다.
"다시 말해보아라." 권도현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그 안에는 이미 결론을 내린 듯한 냉기가 배어 있었다. "연회장에서 백장미가 짓밟혀 있던 것을 처음 발견한 것이 누구였느냐."
"저, 저였습니다." 앞줄에 있던 하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녀의 손끝은 치맛단을 움켜쥔 채 하얗게 질려 있었고, 그 창백함이 오래된 아마포처럼 색이 빠져 보였다. 그녀는 말을 이어가는 중간에도 몇 번이나 침을 삼켰는데, 그 소리가 방 안의 침묵 속에서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 "세아 아가씨께서 다치신 직후였습니다. 꽃다발이... 이미 짓이겨진 채로 바닥에 떨어져 있었어요. 꽃잎이 발자국 모양으로 짓눌려 있어서, 저는 처음엔 누군가 실수로 밟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실수로." 권도현은 그 단어를 입안에서 굴리듯 되뇌었다. "그래서 실수라고 여겼는데, 지금은 왜 그렇게 여기지 않는 것이냐."
하녀는 대답을 찾지 못한 채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그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촛불에 비쳐 보였다.
권도현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꽃다발은 누구의 것이었지?"
"권서은 아가씨께서... 준비하신 것이라 들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를 위해 손수 고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순간 응접실을 채우고 있던 정적이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치 침묵 그 자체가 실체를 얻어 방 안 구석구석을 메우는 듯했고, 그 무게가 무릎 꿇은 자들의 등을 짓누르는 듯도 했다. 권도현은 손끝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두어 번 두드리며 눈을 가늘게 떴는데, 그 표정에는 이미 어떤 답을 정해두고 확인 절차만 밟는 자의 여유가 묻어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는데, 그 움직임이 마치 먹잇감의 냄새를 더 가까이서 맡으려는 짐승의 것과 닮아 있었다.
"본인의 꽃을 본인이 짓밟았다는 것이냐, 아니면." 그는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누군가에게 그것을 그렇게 만들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냐."
하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고, 옆에 있던 시동이 대신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하녀보다는 덜 떨렸으나, 그 역시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바닥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세아 아가씨께서 다치신 직후, 서은 아가씨의 옷자락에 꽃잎이 묻어 있는 것을 보았다는 이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저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옷자락뿐이 아니라, 손등에도 붉은 자국이 있었다고... 그것이 넘어지시며 생긴 상처인지, 아니면."
"아니면 무엇이냐." 권도현이 말을 가로챘다.
시동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침묵으로 그 뒷말을 대신할 뿐이었는데, 그 침묵이 오히려 어떤 말보다도 무겁게 방 안에 내려앉았다.
"흠." 권도현은 짧게 코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는 이미 정해진 판결을 확인하는 소리에 가까웠다. 그는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등을 곧게 세우며 그 시선을 방 안 전체로 던졌다. "장녀가 동생을 시기하여 소란을 만들었다, 이 말이로군. 몇 해 전부터 그 아이가 서은을 그렇게 대하지 않았느냐는 소문이 있었지. 겉으로는 상냥한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제 자리를 넘볼까 늘 경계하고 있었다는."
최문석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목덜미의 근육이 미세하게 조여드는 것을 느꼈으나, 표정은 여전히 석고처럼 굳어 있어 그 속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는 오래도록 이 저택의 그늘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었고, 그 그늘이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위치에 있었다. 그의 눈은 아주 잠깐 촛불에 비친 권도현의 그림자를 훑었는데, 그 그림자가 벽 위에서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무언가를 삼키려는 짐승의 아가리처럼 일그러져 보였다.
"자작님." 최문석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낮고 절제되어 있었지만, 그 안에는 오랜 세월 눌러두었던 어떤 감정의 결이 아주 얕게 스쳐 지나갔다. "소인이 아는 서은 아가씨는 그런 짓을 벌일 분이 아니십니다."
"자네가 그것을 어찌 그리 확신하는가." 권도현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은근한 조롱이 섞여 있었는데, 마치 늙은 집사의 충심 어린 항변 따위는 애초에 판결을 뒤집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자의 여유였다.
최문석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지나치게 길어, 방 안의 누구도 감히 먼저 말을 잇지 못했다. 무릎 꿇은 하녀와 시동조차 숨을 죽인 채 늙은 집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는데, 그 기다림 속에서 촛불만이 이따금 심지를 태우는 소리를 냈다.
"제가 그분을 오랫동안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렇게 답했으나, 그 말 뒤에 삼켜진 다른 문장이 있다는 것을, 적어도 그 자신만은 알고 있었다. 서은 아가씨가 자란 세월을, 그 조용한 눈빛이 어떤 밤들을 견뎌왔는지를, 이 집안의 누구보다 가까이서 보아온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것을. 그러나 그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권도현은 손끝으로 서류를 밀어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그림자가 촛불에 길게 늘어져 벽을 타고 미끄러지듯 움직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사냥감의 냄새를 맡은 짐승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등 뒤로 맞잡은 채 방 안을 몇 걸음 거닐었고, 그 발소리가 카펫 위에서도 유난히 또렷하게 울렸다.
"자네의 충심은 알겠으나, 지켜본 것과 밝혀낸 것은 다른 것이다." 그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이제 조금의 여유마저 사라지고, 오직 냉정한 결단만이 남아 있었다. "이 저택에서 벌어진 일은 이 저택의 이름으로 밝혀야 한다. 소문이 밖으로 새어 나가기 전에, 오늘 밤 안으로 진상을 가려야 한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무릎 꿇은 하녀와 시동을 내려다보았다. "너희는 물러가라. 오늘 이 자리에서 들은 말을 밖에서 함부로 옮기는 자가 있다면, 그 목이 어찌 될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두 사람은 황급히 몸을 일으켜 뒷걸음질로 방을 빠져나갔고, 그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방 안에는 이제 권도현과 최문석, 그리고 흔들리는 촛불만이 남았다.
"권서은을 이곳으로 불러와라." 권도현이 말했다.
최문석은 고개를 숙였으나, 그 눈동자만은 아주 잠깐 권도현을 향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것은 순종의 표시가 아니라, 오히려 무언가를 오래도록 기다려온 자의 눈빛에 가까웠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문 쪽으로 향하면서도, 그 걸음걸이 하나하나에 조금의 흔들림도 내보이지 않았는데, 마치 오랜 세월 이런 순간들을 미리 연습해 온 사람처럼 보였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촛불이 흔들리며 그림자들이 일제히 몸을 뒤척였다. 그 어둠 속에서 최문석은 조용히 뒷걸음질 쳐 벽 쪽으로 물러났는데, 그 움직임이 소리 없이 미끄러지는 물뱀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는 문턱을 넘어서기 직전, 다시 한번 응접실 안쪽을, 초상화 속 죽은 안주인의 눈매와 그 아래 팔걸이의자에 앉은 자작의 옆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소리는 나지 않았으나, 그것은 분명 어떤 말이었다.
이제 시작이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두운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소리는 이내 침묵 속으로 사라졌고, 촛불은 여전히 그 흔들림을 멈추지 않은 채 응접실 안을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밝음 아래, 권도현은 팔걸이의자에 다시 등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그 얼굴에는 어떤 확신에 찬 평온함이 감돌고 있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방 안의 어둠보다 더 서늘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