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백합 문장, 여신의 저주

4화

회상은 거기서 잘려나가듯 끊어졌고, 하윤은 다시 신전 같은 방, 대리석 바닥 위에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는 현재로 돌아왔는데, 손목에는 여전히 검붉은 백합 문양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그 위로 다월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바닥은 차갑고 매끈했으며, 무릎을 짓누르는 그 냉기가 이상하게도 며칠 전 사고가 나던 그 밤의 감각과 겹쳐지는 것 같아서, 하윤은 저도 모르게 손목을 다시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때 그 저주가…… 지금 이거였다는 거야.' 하윤은 자신이 겪었던 며칠 전의 사고와 지금 눈앞의 이 상황이 하나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가슴 한편이 무겁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퍽, 하고 뒤늦게 기억 속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분명 그날,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뒤통수를 스치고 지나간 서늘한 바람과 함께 손목이 타는 듯이 뜨거웠던 순간이 있었는데, 그때는 단순한 화상이라 여기고 넘겼던 그 통증이, 실은 이 붉은 백합 문양이 새겨지는 순간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그럼 그때부터 이미…… 나는 여기로 끌려올 운명이었다는 건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고, 하윤은 애써 입술을 깨물며 그 떨림을 가라앉히려 했다. "이제야 이해했다는 표정이네." 다월이 그런 하윤을 내려다보며 담담히 말했고, 그 목소리에는 하윤의 혼란을 즐기는 듯한 여유가 배어 있었다. 그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동시에 어딘가 서늘한 결이 섞여 있어서, 마치 얼음 위에 흐르는 꿀처럼 달면서도 차가웠다. "그럼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간신히 목소리를 짜낸 하윤의 물음에 다월은 잠시 침묵하더니, 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그 손은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얗고 매끈했으며, 손가락 하나하나가 마치 정교하게 조각된 예술품처럼 완벽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는데, 손톱 끝까지도 흠 하나 없이 다듬어져 있어서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어느 화가가 상상 속에서만 그려낼 법한 손처럼 보였고, 하윤은 그 손을 바라보며 이상하게도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왜…… 이런 상황에서도 저 손이 예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질 만큼 뜬금없는 생각이었지만, 다월의 존재감은 그런 잡념조차 이상하게 만들어버릴 만큼 압도적이었다. 허리까지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마치 달빛을 그대로 짜낸 듯 은은하게 빛나는 은발이었고, 그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는 깊은 밤하늘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짙은 파란색이었는데, 그 눈이 지금 이 순간 오직 하윤만을 향해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숨을 조여왔다. "내가 특별히 도와주지." 다월의 말에 하윤은 순간 안도감이 스치는 것을 느꼈지만, 그 안도는 곧바로 뒤이은 말로 산산이 부서졌다. "물론, 공짜는 아니야." 그 한마디에 하윤의 등줄기가 서늘해졌고, 방금까지 느꼈던 미약한 희망이 순식간에 불안으로 뒤바뀌었다. '대가라니…… 도대체 뭘 요구하려는 거야……' 혹시 목숨을 내놓으라는 건 아닐까, 아니면 평생 이곳에 붙잡혀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 별의별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의문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다월은 하윤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는데, 그 손끝의 서늘한 온도가 피부를 타고 그대로 전해져오는 감각에 하윤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손을 맞잡은 그 짧은 순간, 심장이 이상하게 크게 뛰는 것을 느끼며 하윤은 애써 그 감각을 무시하려 했다. "백합 로맨스 체험이라는 게, 정확히 뭘 하라는 거예요." 하윤이 조심스럽게 묻자, 다월은 그제야 처음으로 진심으로 즐거운 듯한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 웃음소리는 맑고 청아하면서도 어딘가 위험한 음색을 띠고 있었다. "신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인간계의 백합 서사를 관측하고 수집해왔지. 그건 인간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감정 중에서도 가장 정제되고 아름다운 형태로 여겨지거든." 다월은 그렇게 말하며 신전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갔고,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하윤은 방 안 벽면을 가득 채운 서가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는데, 그곳에는 인간계에서는 절판되었거나 구하기 힘든 백합 소설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책등에는 낡은 것부터 최신의 것까지, 심지어 하윤이 학창 시절 몰래 사서 읽었던 절판본까지 섞여 있어서, 그 광경을 마주한 순간 하윤은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꼈다. '이걸 전부…… 신계에서 모아왔다는 거야?' "인간들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가장 순수한 형태의 감정을 만들어내지. 특히 두 여인 사이에서 피어나는 감정은, 그 어떤 서사보다도 섬세하고 오래 여운을 남기더군." 다월은 서가를 손끝으로 가볍게 스치며 말을 이었고, 그 손끝이 책등을 훑어 내려가는 소리가 사각, 사각, 하고 방 안에 조용히 울렸다. "그리고 나는, 그 백합 서사의 최고 감상자이자 최고의 수집가로서,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다." 다월의 그 선언에 하윤은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마치 하나의 신앙처럼 확고한 태도였다. "그동안은 늘 관측자의 입장에서 지켜보기만 했지. 하지만 관측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더군. 이를테면, 손끝이 스칠 때 느껴지는 그 미묘한 떨림 같은 것 말이야." 말을 마친 다월이 몸을 돌려 하윤에게 다가왔고, 그 걸음걸이는 마치 무대 위를 걷는 배우처럼 우아하면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너는 나와 함께 이 서사를 완성해나갈 여주인공이 되는 거야." 다월이 그렇게 말하며 하윤을 향해 몸을 돌렸을 때, 그 파란 눈동자 안에는 장난기와 확신이 동시에 뒤섞여 있었고, 하윤은 그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 하고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저는 그냥 평범한 사람인데…… 왜 하필 저를……" 간신히 반박이라도 해보려 했지만, 다월은 그 말을 가볍게 잘라내며 웃었다. "평범해서 고른 거야. 특별한 사람은 이미 특별한 서사를 갖고 있으니까, 재미가 없거든." 그 대답이 오히려 더 무섭게 들려서, 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 진짜로 진심이야……' 그 확신이 들자 하윤의 마음속에서는 절망과 함께 이상한 예감 하나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는데, 이 관계가 결코 단순하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지만 강렬한 예감이었다. 그리고 그 예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월은 손목의 백합 문양을 손끝으로 가볍게 짚으며 낮게 웃었다. "참, 하나 더. 이 문양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너는 나를 떠날 수 없어." 그 한마디에 하윤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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