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눈을 뜬 것은 새벽이었다.
강도현은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어둠에 익은 눈이 서서히 방 안의 윤곽을 그려냈다. 낡은 서까래, 갈라진 흙벽, 그리고 그 틈으로 스며드는 희미한 새벽빛. 익숙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 익숙함 속에서, 그는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려 하자, 어젯밤의 매질로 생긴 상처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등짝을 가로지른 채찍 자국, 옆구리에 남은 발길질의 흔적. 손끝으로 슬쩍 짚어보니 아직 부어 있었다. 하지만 통증의 결이 달랐다. 예전 같으면 며칠은 신음하며 앓았을 상처들이, 지금은 그저 무디게 느껴질 뿐이었다. 마치 남의 몸에 난 상처를 만지는 듯한, 낯선 거리감이었다.
'이상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상반신을 세우는 순간, 근육 하나하나가 뻐근하게 당겨왔지만, 그 뻐근함마저 어딘가 이상했다. 아프긴 한데, 예전의 그 지긋지긋한 아픔이 아니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낯선 감각이 스쳤다. 마치 몸속 깊은 곳에 흐르는 무언가가 있는 듯한, 설명할 수 없는 이물감이었다. 피부 아래, 근육과 뼈 사이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맥동하고 있었다.
방 한구석, 목함이 열린 채 놓여 있었다. 강도현은 무릎으로 기어가 그 앞에 앉았다. 나무로 된 낡은 함, 그 안에 담겨 있던 씨앗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있었다. 손을 넣어 안쪽을 더듬어보았지만,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른 나무 냄새만이 은은하게 풍겨왔다.
'그게 다 꿈이 아니었어···'
그는 천천히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아무 흔적도 없었다. 굳은살과 상처투성이인 평범한 손이었다. 하지만 손끝을 조금 움직이자, 미세한 기의 흐름이 손가락을 타고 도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손끝 아래로 실개천이 흐르는 듯한 감각. 강도현은 숨을 죽였다.
'이게 바로 그···'
어젯밤 목소리로 들었던 이름이 떠올랐다.
'천진만상결.'
낯선 이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입안에서 그 발음이 부드럽게 감겼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말처럼.
그는 눈을 감고 조용히 숨을 골랐다. 방 안의 공기가 서늘했다. 아버지가 말한 대로 새겨진 것이라면, 몸 어딘가에 그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었다. 강도현은 가만히 앉아 자신의 호흡에 집중했다. 들숨과 날숨, 그 단순한 반복 속에서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이.
숨을 들이쉬자, 놀랍게도 몸속 어딘가에서 반응이 왔다. 단전이라 불리는 자리, 아랫배 깊은 곳에서 작은 떨림이 일었다. 마치 그 흐름을 따라가라는 듯, 자연스럽게 길이 열렸다. 기운이 단전을 타고 돌기 시작했다. 처음엔 실낱같이 가늘었던 그것이, 호흡을 이어갈수록 점점 두꺼워졌다.
'말도 안 돼···'
무공을 배운 적 없는 그였다. 잡역 제자로 2년, 검을 잡아본 적도, 내공을 익혀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몸은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움직였다. 기운이 팔을 타고 흐르다 손끝에 모였다. 손끝이 저릿하게 뜨거워졌다. 마치 그 안에 작은 불씨가 담긴 듯한 느낌이었다.
강도현은 저도 모르게 눈을 떴다. 손끝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무언가가 그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시험해봐야 한다.'
그가 무심코 손끝을 벽 쪽으로 뻗자, 낡은 나무 벽에 실금이 갔다.
'쩌적―.'
소리 없이 놀란 강도현은 얼른 손을 거둬들였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널뛰었다. 방금 그건, 그저 손끝을 뻗었을 뿐인데. 힘을 준 것도 아니었다. 그저 기운이 그쪽으로 흘러갔을 뿐인데, 벽이 갈라졌다.
'이 정도의 힘이···'
그는 잠시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마디마디를 접어보고, 펴보고, 다시 접어보았다. 어제까지의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몸이었다. 잡역 제자로 2년을 살며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매일같이 물을 긷고 장작을 패던 그 팔이, 이제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창밖으로 새벽빛이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하늘 끝자락이 옅은 남색에서 회백색으로 물들어가는 시각. 그는 몸을 일으켜 마당으로 나섰다. 문을 열자 차가운 새벽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아무도 없는 시간, 오직 자신만이 이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잡역각의 다른 방들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코를 고는 소리, 뒤척이는 소리가 벽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왔다. 강도현은 발소리를 죽이며 마당 한쪽으로 걸어갔다. 흙바닥에 남은 발자국조차 조심스러웠다.
마당 한쪽에 서서, 그는 조심스럽게 기운을 다시 끌어올렸다. 아랫배에서 시작된 흐름이 다시 손끝까지 이어졌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훨씬 익숙하게 느껴졌다. 마치 며칠 동안 연습해온 것처럼.
아버지의 목소리가 남긴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천진만상결. 하늘의 순리를 거스르는 힘이니, 함부로 쓰지 마라. 하지만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주저하지 마라.'
그 목소리는 여전히 귓가에 선명했다. 낮고, 무겁고, 슬픔이 배어 있던 그 음성. 강도현은 그 말을 몇 번이나 되새겼다.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힘을 쓸 명분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지켜야 할 것. 그 말이 뜻하는 게 무엇인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머니 윤소영. 남천성이라는 이름. 그리고 자신이 겪은 모든 굴욕에 대한 대가.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애써 미소를 짓던 흔들리는 눈빛. 그 미소 뒤에 숨겨진 원망과 슬픔. 강도현은 이를 악물었다. 남천성.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마당 끝, 나뭇가지 하나가 바람에 흔들렸다. 강도현은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별다른 동작 없이, 단지 기운을 흘려보냈을 뿐인데, 나뭇가지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잎사귀 몇 개가 파르르 떨리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강도현은 다시 한번 시도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힘을 주어보았다. 나뭇가지가 갑자기 크게 휘청였다. 뚝, 소리를 내며 가느다란 잔가지 하나가 부러져 떨어졌다.
'조절해야 한다. 아직은 이 힘을 제대로 다룰 수가 없어···'
그는 숨을 고르며 다시 기운을 갈무리했다. 몸속에서 느껴지는 힘은 거대했지만, 아직 정교하게 다룰 자신은 없었다. 조급하게 나섰다가는 오히려 화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활활 타오르는 불도, 다스릴 줄 모르면 자신을 태워버리는 법이었다.
강도현은 부러진 나뭇가지를 주워들었다. 손안에서 가볍게 부서지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땅에 내려놓았다.
'두 달.'
갑자기 떠오른 것은 수련대전이었다. 매년 열리는 무진문의 행사로, 그해의 성과를 인정받아 정식 제자 중 첫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자리였다. 올해는 두 달 뒤로 예정되어 있었다.
수련대전. 무진문 전체가 들썩이는 그 행사를 강도현도 여러 번 지켜본 적이 있었다. 정식 제자들이 저마다의 무공을 겨루고, 그 결과에 따라 문파 내 서열이 재편되는 자리. 잡역 제자인 그는 그 안에 낄 자격조차 없었다. 그저 멀리서, 담장 밖에서 구경만 하던 존재였다.
설서리는 그 첫 제자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모두가 그녀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지난해에도, 그 전해에도 이미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준 그녀였다. 무진문 내에서 그녀를 이길 자는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강도현의 뇌리에 설서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차갑고 오만한 눈빛, 언제나 자신을 벌레 보듯 내려다보던 그 시선.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던 서해의 비열한 웃음.
'그 자리에서, 그녀와 맞선다.'
강도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제까지의 무기력한 잡역 제자가 아니었다. 그는 몸속에서 흐르는 낯선 기운을 다시 한번 느끼며, 조용히 다짐했다.
'두 달 안에 이 힘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수련대전에서, 모든 걸 되갚아준다.'
그 다짐이 입안에서 씹히듯 되풀이되었다. 되갚아준다. 그 말 안에는 지난 2년간의 모든 굴욕이 담겨 있었다. 밥그릇을 걷어차이던 순간, 동료들의 조롱,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머니를 위협하며 짓밟으려 하던 무진문의 냉대까지.
마당을 벗어나기 전,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어두운 새벽하늘에, 별 하나가 유난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다른 별들이 이미 빛을 잃어가는 그 시각에도, 그 별만은 홀로 또렷했다.
강도현은 그 별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마치 그것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알려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감상에 젖을 시간이 없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냉정한 계산과 철저한 은닉이었다.
그 순간, 잡역각 저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강도현은 재빨리 기운을 완전히 갈무리하고 평소의 무기력한 걸음걸이로 돌아왔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발걸음을 질질 끌듯이. 지난 2년 동안 익혀온 그 모습으로 순식간에 돌아갔다. 누군가 이 변화를 알아채서는 안 됐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강도현은 우물가로 걸어가 물을 긷는 척했다. 두레박을 던지고, 끌어올리고, 평소와 다름없는 동작을 반복했다. 손끝에는 여전히 미세한 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흔적도 드러나지 않았다.
발소리의 주인은 잡역각의 다른 제자였다. 잠에서 덜 깬 얼굴로 마당을 가로질러 화장실 쪽으로 향하던 그는, 강도현을 흘긋 보고는 별다른 관심 없이 지나쳤다. 강도현은 안도의 숨을 삼켰다.
하지만 그가 미처 눈치채지 못한 곳, 담장 너머 어둠 속에서 낯선 인영 하나가 조용히 자리를 뜨고 있었다. 지난밤 방 안에서 새어 나온 백색 광채를 분명히 목격한 자였다.
그 인영은 검은 옷자락을 두르고 있었다. 얼굴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오직 눈빛만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잡역각의 담장을 따라 조용히, 발소리조차 남기지 않고 움직였다. 밤새 그곳에 숨어 있었던 듯, 이슬에 젖은 옷자락이 걸음마다 소리 없이 흔들렸다.
그 인영의 발걸음은 곧장 무진문 본전 쪽을 향했다. 새벽어둠을 뚫고, 그는 잡역각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그의 발걸음에는 조급함이 없었다. 마치 이미 확신하고 있다는 듯, 느리지만 단호한 걸음이었다.
강도현이 눈치채지 못한 사이, 그의 각성 소식은 이미 다른 이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새벽하늘의 별은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었지만, 그 아래 무진문의 어둠 속에서는 이미 새로운 폭풍이 조용히 태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