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파혼당한 날, 각성하기로 했다

1화

새벽 공기가 아직 식지 않은 무진문 뒷마당, 잡역각 앞마당에는 오물통을 짊어진 강도현이 서 있었다. 어깨에 걸린 나무통에서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매일 아침 코끝이 먼저 반응했다. 그는 통을 고쳐 메며 발걸음을 옮겼다. 잡역각 뒤편의 도랑까지 이어지는 길은 진흙투성이였고, 어제 내린 비 때문에 발이 자꾸 미끄러졌다. 2년째였다. 아버지 강천호가 사라진 뒤로, 남천성의 후계자였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 잡역 제자로 불렸다. 무공을 배우기는커녕 뒷간을 치우고 장작을 패는 것이 그의 하루였다. 처음엔 억울함에 밤새 이를 갈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감정도 무뎌졌다. 무뎌진다는 것, 그것이 가장 두려운 변화였다. 통을 도랑에 비우고 나서, 강도현은 잠시 허리를 폈다. 뻐근한 통증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손등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었고,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장작을 패다 생긴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오늘도 별일 없이 지나가면 다행이지···' 생각을 마치기도 전,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땡- 땡- 땡-' 세 번, 대전 앞에 모이라는 소집종이었다. 평소와 다른 울림이었다. 보통의 점호 종소리보다 훨씬 다급하고 컸다. 잡역 제자들 사이에서도 수군거림이 번졌다. 통을 짊어진 자들, 장작을 나르던 자들, 마당을 쓸던 자들 모두가 손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늘 뭔 일 있나?" "설 소저가 부른 거라던데." "설 소저가? 왜?" "몰라, 대전 앞에 정식 제자들이 죄다 모였다더라." 설서리. 그 이름이 나오자 강도현의 손끝이 순간 굳었다. 어릴 적 집안의 결정으로 정해진 정혼자, 무진문의 핵심 제자이자 천재로 불리는 여인이었다. 남천성과 설가의 오랜 인연으로 맺어진 약속, 그 약속의 상대가 부른다는 말에 좋은 예감은 들지 않았다. 그는 통을 내려놓고 손을 씻었다. 우물가의 찬물이 살갗을 아릿하게 스쳤다. 손을 대충 털고, 옷자락에 묻은 흙을 툭툭 두드렸다. 어차피 깨끗해질 리 없는 옷이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자존심이었다. 대전으로 향하는 길, 그는 몇몇 정식 제자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그를 힐끗 보고는 코를 막는 시늉을 하며 지나갔다. 익숙한 시선이었다. 익숙해질 필요가 없는 시선이기도 했다. 대전 앞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정식 제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그 앞에 설서리가 서 있었다. 흰 옷자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 여느 때처럼 화려했다. 옥으로 만든 비녀가 그녀의 머리에서 은은한 빛을 냈고, 허리에 찬 검집조차 예술품처럼 정교했다. 강도현은 무리의 가장 뒤편에 섰다. 그의 자리는 늘 그곳이었다. 잡역 제자에게 정해진 위치, 앞으로 나설 자격이 없는 위치. "강도현." 그녀의 목소리가 넓은 마당을 갈랐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강도현에게 쏟아졌다. 수백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그를 향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예, 소저." 강도현은 지그시 고개를 숙였다. 오랜 습관이었다. 잡역 제자로서 몸에 새겨진 태도였다. 허리를 굽히는 각도까지도 몸이 먼저 알아서 정해주었다. 설서리는 그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에는 동정도, 미안함도 없었다. 오직 계산이 끝난 자의 무심함만이 있었다. 마치 이미 오래전에 결론을 내려놓고, 이제야 그 결과를 발표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오늘부로 그대와의 약속을 파기하겠다." 순간 마당이 얼어붙었다. 침묵. 긴 침묵. 바람 한 자락이 마당을 스치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누군가의 옷자락이 흔들리는 소리, 누군가의 숨을 참는 소리, 그 작은 소음들이 정적 속에서 유난히 크게 들렸다.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가 그 정적을 깼다. "소저, 그게 무슨···" "이유는 간단하다." 설서리는 말을 끊고 부채를 활짝 펼쳤다. 붉은 매화가 그려진 부채가 그녀의 입가를 가렸다. 그 뒤로 그녀의 눈만이 보였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계산기처럼 맑은 눈이었다. "남천성은 이제 이름뿐인 가문이다. 성주는 실종되었고, 재산은 바닥났다. 내가 그대와의 정혼을 유지해 얻을 게 무엇이지?" 웅성거림이 커졌다. 몇몇 제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조했고, 몇몇은 강도현을 향해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안타까움조차, 진심이 아니라 그저 자리에 맞는 표정이었다. 강도현은 이를 악물었다.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표정만은 애써 무겁게 눌렀다. 손가락이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옷감이 손안에서 구겨졌다. '이용 가치가 다했다는 거군···'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애초에 이 약속은 그대 부친과 우리 가문 사이의 거래였을 뿐. 부친이 사라진 지금, 지킬 이유가 없다." 사람들이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참새라 불리는 잡역 제자 하나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낄낄거렸다. 그의 웃음소리는 작았지만, 조용한 마당 안에서는 유독 선명하게 울렸다. "쟤 저럴 줄 알았지. 폐인이랑 무슨 약혼이야." "거 봐,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니까." 옆에 선 다른 잡역 제자가 맞장구를 쳤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다시 낄낄거렸다. 강도현의 귀에 그 말이 정확히 박혔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분노인지 수치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뒤섞여 속을 뒤집었다. 뱃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솟았다가, 이내 차갑게 식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진문 안에서 잡역 제자의 목소리는 아무 힘이 없었다. 목소리를 낸다 한들, 그것은 조롱을 더 키울 뿐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지난 2년 동안 뼈저리게 배웠다. 설서리는 부채를 접으며 한 발짝 다가섰다. 그녀의 발걸음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대도 이해하겠지. 이제 우리는 아무 관계도 아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옅은 즐거움이 섞여 있었다. 강도현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는 것, 눈매가 살짝 휘어지는 것. 남들은 알아채지 못할 작은 변화였지만, 그는 똑똑히 보았다. '즐기고 있어···' 그 순간, 그의 눈에 이상한 것이 비쳤다. 설서리의 소맷자락이 살짝 흔들릴 때, 그 아래로 언뜻 스치는 기운의 결이 보였다. 남들은 보지 못하는 흐름이었다. 마치 물결처럼, 그녀의 몸을 타고 도는 기의 궤적이 눈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푸른빛을 띤 실선 같은 것이 그녀의 팔을 따라 흐르다가, 손목에서 소용돌이치듯 맴돌았다. 그것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실이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저게 뭐지···' 강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가, 곧바로 시선을 내렸다. 이상한 순간이었다. 무공을 배운 적도 없는 그가, 어째서 저런 것을 볼 수 있단 말인가.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었다. 마치 무언가가 그의 안에서 반응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 의문은 순식간에 다른 감정에 묻혔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오늘 이후로 그대는 강가의 아들일 뿐, 나와는 무관한 사람이다." 설서리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새하얀 옷자락이 바람을 가르며 물러났다. 그녀의 뒷모습은 처음부터 미련이 없었다는 듯 당당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몇몇은 강도현을 힐끗거리며 지나갔고, 몇몇은 대놓고 웃음을 흘렸다. 어느 노년의 문지기 하나만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곧 시선을 피하며 자리를 떴다. 서해가 그 틈에 다가왔다. 잡역원 관리자, 강도현을 2년간 감독한 자였다. 그의 입가에는 비열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들었지? 이제 넌 정말 아무것도 아니게 됐어." "···" 강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해는 그런 그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실눈을 뜨며 다가섰다. "참, 표정 좋다. 그런 표정으로 뒷간이나 치우러 가라고." ".." "오늘 밤 야간 작업조에 들어가라. 뒷간 청소 말고, 이번엔 도랑 쪽이다. 요즘 비가 많이 와서 막혔거든." 강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할 힘도 아까웠다. 목구멍이 뻑뻑했다. 무슨 말을 하려 해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서해는 그의 어깨를 툭 치고는 자리를 떴다. 웃음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강도현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마당을 벗어나며, 그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회색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곧 비가 내릴 듯한 날씨였다. '2년 전, 아버지가 사라진 그날부터 지금까지···' 생각이 거기서 멈췄다.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그날의 소란,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몰락까지. 그것들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무뎌지지 않는 상처였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오늘의 이 굴욕을, 그는 잊지 않을 것이다. 멀리서 설서리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강도현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참새의 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여전히 따라붙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던 그의 눈앞에, 다시 그 푸른 실선이 스쳤다. 이번엔 자신의 손끝에서였다. 강도현은 걸음을 멈췄다. 손을 들어 눈앞에 가져다 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 분명히 보았던 그 기운의 흔적은, 이제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착각인가···' 하지만 착각이라 하기엔 너무도 선명했다. 그는 손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굳은살과 상처로 가득한 손, 그 어디에도 특별할 것 없는 손이었다. 그럼에도 무언가가, 분명히 그의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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