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산 초입, 이끼 낀 바위 옆.
나는 게임에서 외우다시피 한 초반 필수 레시피, '정화수 물약'을 만들기 위해 재료를 그러모으고 있었다. 은박초 세 줌, 정화수정 한 알, 유리병 하나. 게임에서는 인벤토리 창에 재료 아이콘 세 개를 끌어다 조합 버튼 한 번만 누르면 끝나는 일이었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은박초라고 알고 있던 풀은 겉모습만 비슷할 뿐, 실제로 뜯어보니 줄기마다 수분 함량이 다 달랐다. 어떤 줄기는 손끝으로 누르면 물기가 뚝뚝 떨어질 정도로 축축했고, 또 어떤 줄기는 마른 종잇장처럼 바싹 말라 부스러졌다. 게임 아이콘은 그저 '은박초 x1'이라는 균일한 데이터였지만, 지금 내 손안에 있는 것은 살아 있는 식물이었다. 당연한 소리인데, 그 당연함을 나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정화수정도 마찬가지였다. 게임 화면 속에서는 손톱만 한 크기로 반짝이는 파란 육각형 아이콘이었는데, 실물은 표면이 거칠고 한쪽 모서리가 깨져 있었다. 이게 정말 그 정화수정이 맞나 싶어서 몇 번이나 눈앞에 대고 돌려 봤다. 빛에 비춰 보니 안쪽에 자잘한 균열이 그물처럼 퍼져 있었다. 불량품인가, 아니면 원래 이런 건가. 알 수가 없었다.
"괜찮아, 비율만 맞추면 되겠지."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은박초를 절구에 넣고 짓이겼다. 절굿공이를 쥔 손목이 벌써부터 후들거렸다. 일곱 살짜리 몸으로 하는 육체노동은 생각보다 훨씬 고역이었다. 게임 속 마녀는 손끝만 까딱해도 재료가 알아서 갈리던데, 지금 나는 팔이 빠질 것 같았다.
결과물은 예상보다 훨씬 질척했다. 게임 아이템 설명에는 '맑고 투명한 액체'라고 쓰여 있었는데, 눈앞의 이것은 걸쭉한 녹색 진흙에 가까웠다. 색도 이상했다. 설명문에 적힌 청록색이 아니라 거의 흙탕물에 가까운 갈색빛 초록이었다. 이거 맞아? 나는 몇 번이나 재료 목록을 되짚어봤다. 은박초, 정화수정, 물. 순서도 맞았고 비율도 게임 공략 게시판에서 본 그대로였다. 그런데도 결과물은 전혀 딴판이었다.
그래도 나는 밀어붙였다. 정화수정을 빻아 가루로 만들고, 그 위에 짓이긴 은박초를 부었다. 손등에 초록 진흙이 튀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 정도 시행착오야 게임에서도 흔한 일 아닌가, 처음엔 다들 실패하다가 나중엔 손에 익는 거지,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순간, 절구 안에서 부글부글 거품이 일었다.
어, 이거 이상한데.
거품은 처음엔 작고 앙증맞았다. 마치 탄산음료를 흔들었을 때처럼 자잘한 기포가 표면 위로 올라왔다 사라지는 정도였다. 나는 그것도 조합 과정의 일부인 줄 알고 태연하게 절굿공이로 계속 저었다. 게임에서는 조합에 실패하면 그냥 '조합 실패' 텍스트 창이 뜨고 재료가 그대로 소멸했다. 실패해도 안전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정도 거품쯤은, 뭐, 별일 아니겠지.
그러나 지금 절구 안의 거품은 점점 부풀어 오르며, 매운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코끝이 찡했다. 마치 양파를 백 개쯤 한꺼번에 썰어놓은 듯한 냄새가 훅 끼쳤고, 눈에서는 벌써부터 눈물이 찔끔 나왔다.
"아, 조졌다."
나는 정확히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냈다. 왜냐하면 다음 순간, 절구가 그대로 터졌기 때문이다.
퍽!
초록빛 진흙이 사방으로 튀며 내 얼굴과 옷을 뒤덮었다. 눈이 매워 순간적으로 앞이 안 보였고, 입안에 들어간 액체는 쓰디쓴 흙맛이었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매로 눈을 닦으며 한참을 콜록거렸다.
콜록, 콜록. 목구멍이 따가웠다. 코로 들어간 진흙의 매운 기운이 머릿속까지 뻗치는 것 같았다. 옷은 이미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그나마 아침에 입고 나온 옷이 낡아빠진 삼베옷이라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이게 빨아서 입을 만한 좋은 옷이었다면 나는 지금 옷값까지 더해서 억울해했을 것이다.
[클래프팅 실패] 재료 손실: 은박초 x3, 정화수정 x1
반투명한 시스템 창이 무심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게임에서는 그저 숫자 하나가 깎이는 일이었는데, 지금 나에게는 이순영이 며칠간 아껴 모은 동화 몇 푼이 통째로 날아간 사건이었다. 정화수정은 시장에서 은근히 비싸게 팔리는 물건이었으니까. 그걸 구하려고 나는 마을 뒷산까지 걸어가서 좌판 할머니한테 몇 시간이나 흥정을 했었다. 할머니는 어린애가 무슨 정화수정이 필요하냐며 몇 번이나 되물었고, 나는 그때마다 그냥 심부름이라고 둘러댔다. 그렇게 겨우 구한 게 절구 안에서 거품이 되어 사라진 것이다.
나는 진흙투성이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게 진짜 저주 아닌가.
게임에서는 만렙 찍고 도시 하나를 정화하던 캐릭터가, 이 현실에서는 초등학생도 안 되는 몸으로 물약 하나 못 만들어서 얼굴에 진흙을 뒤집어쓰고 있다니. 인과율이 나를 대놓고 놀리는 기분이었다.
문득, 예전에 게임 공략 게시판에서 본 댓글 하나가 떠올랐다.
[유저 댓글] "정화수 물약, 초보 때 대충 만들어도 절대 안 터짐ㅋㅋ 재료 아까우면 그냥 아이템창에서 눌러라"
그 댓글이 이렇게 배신감 있게 느껴질 줄이야.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진흙을 닦아냈다. 손바닥에 초록빛 얼룩이 묻어 나왔다. 이걸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게임 지식은 완벽하게 외우고 있는데, 그 지식이 현실에서는 절반도 안 통한다는 게 이렇게 뼈저리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그날 밤, 나는 다시 상태창을 열어 보았다.
[이서리] Lv.1
[마력] 12/12
[클래스] 마녀 (견습)
[스킬] 없음
레벨은 그대로였다. 실패에는 경험치도 없었다. 당연한 일인데도, 왠지 서러웠다. 나는 게임의 정답을 알고 있는데도, 그 정답이 이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 이상한 위화감을 처음으로 느꼈다. 마치 정확한 지도를 들고 있는데 땅이 계속 움직이는 느낌.
이불 속에서 나는 몇 번이나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오늘의 실패 원인을 되짚어봤다. 첫째, 은박초의 수분 함량을 무시했다. 둘째, 정화수정의 균열을 무시했다. 셋째, 절굿공이로 젓는 순서를 게임 애니메이션 그대로 따라 했다는 것. 그러니까 나는 데이터를 현실에 그대로 이식하려 했던 거고, 현실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았던 거다.
정말 웃긴 일이었다. 나는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을 백과사전 한 권만큼 갖고 있으면서도, 정작 흙 한 줌 다루는 법은 하나도 몰랐다. 게임 캐릭터로서의 나와, 지금 이 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나 사이에는 생각보다 훨씬 깊은 골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위화감은, 다음 날 산에서 벌어진 사고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를 이끌게 되었다.
나는 아직 그 사실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