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처소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두꺼운 참나무 문이 경첩 위에서 낮게 신음하듯 삐걱였고, 그 소리가 잦아들 무렵에야 서은채는 비로소 홀로 남았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녀는 화장대 앞으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촛불 두 개가 은은하게 흔들리며 거울 표면 위로 황금빛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흔들림 속에서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형태를 갖춰갔다.
거울 속에는 대현공작가의 영애다운 단정한 얼굴이 있었다. 곧게 뻗은 콧날과 흐트러짐 없이 정돈된 눈매, 그리고 결코 흔들리지 않도록 오래 훈련된 입가의 곡선까지. 그러나 그 표정 뒤에 숨겨진 또 하나의 얼굴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서은채. 대현공작가의 영애. 그리고 성녀.*
두 개의 이름이 한 사람 안에서 공존한다는 것은, 겉으로 보기엔 축복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끊임없는 균열을 견뎌내는 일이었다. 대현공작가의 정실 소생이 아니라 첩의 몸에서 태어난 그녀는,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절반의 시선으로만 존재를 허락받았다. 아버지인 공작은 그녀를 딸로 인정하되 후계에서는 철저히 배제했고, 정실이 낳은 형제자매들은 그녀를 향해 한 번도 진심 어린 눈빛을 보낸 적이 없었다. 어릴 적, 정원에서 나비를 쫓아 뛰어놀던 적자 언니가 자신을 발견하고는 대번에 하녀를 불러 "저 아이 좀 데려가"라며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았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날 서은채는 처음으로, 자신이 이 집안에서 어떤 존재로 규정되어 있는지를 깨달았다.
그런데 성력이 발현되면서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신전에서 처음 성흔이 드러났던 그날, 대신관이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을 때, 곁에 서 있던 정실부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서은채는 똑똑히 보았다. 성녀라는 이름이 붙자 그녀를 무시하던 시선들이 하루아침에 존경으로 바뀌었고, 아버지는 처음으로 그녀를 식사 자리에 상석 가까이 앉혔으며, 언니들은 다투듯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필요할 때만 성녀, 불필요해지면 서녀.*
거울 속의 얼굴이 흐릿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서은채는 손끝으로 거울의 표면을 가만히 짚으며, 그 안에 비친 자신의 눈동자를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유리는 차가웠고, 그 냉기가 손끝을 타고 팔뚝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전생의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때도 그녀는 늘 누군가의 필요에 따라 이용되었고, 쓸모가 다하면 미련 없이 버려졌다. 웃음도, 헌신도, 심지어 사랑이라 믿었던 감정마저 결국은 계산 위에 놓인 도구였을 뿐. 이번 생에서도 그 굴레는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그녀가 그 굴레를 스스로 부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서은채는 화장대 위에 놓인 작은 상자를 열었다. 나무 뚜껑이 낮은 소리를 내며 젖혀지자, 안에는 어머니가 남긴 유일한 유품인 은빛 귀걸이 한 쌍이 담겨 있었다. 세월에 색이 조금 바랬지만, 여전히 촛불을 받으면 희미하게 빛을 냈다. 서녀로 태어나 궁에서 홀로 병들어 죽은 어머니가 남긴 것은 오직 이 귀걸이 하나뿐이었다. 임종의 순간에도 곁에 아무도 없었다는 말을 훗날 늙은 유모에게서 들었을 때, 서은채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못했었다. 그것을 볼 때마다 가슴 한켠이 서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고,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엄마, 저는 이제 더 이상 숨어 있지 않을 거예요.*
오늘 밤, 왕궁에서는 세자 이현의 혼약 파기가 공표될 예정이었다. 이미 소문은 왕성 전체를 휩쓸었고, 그 소문의 중심에는 목하린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시녀들 사이에서도, 귀족가의 사교 모임에서도 그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는 날이 없었다. 세자가 정치적으로 정해진 약혼녀보다 마음을 준 여인을 택했다는 이야기는, 어떤 이들에게는 낭만으로, 또 어떤 이들에게는 서은채를 향한 비웃음의 근거로 회자되고 있었다.
서은채는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오히려 담담했는데, 배신감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이상하게도 해방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마치 오래도록 목에 감겨 있던 끈이 느슨해지는 듯한 느낌.
*차라리 잘됐어. 더 이상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웃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나 그 담담함 아래에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 앙금이 있었다. 세자와의 혼약은 그녀에게 유일하게 정통성을 부여해주던 끈이었고, 그것이 끊어진다는 것은 곧 그녀를 향한 귀족들의 시선이 더욱 노골적으로 적대적으로 변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성녀라는 이름 하나로 겨우 버텨온 위치가, 이제는 뿌리째 흔들릴 참이었다. 이미 국경에서의 사건으로 그녀는 '악역 영애'라는 낙인이 찍혀가고 있었고, 오늘 밤의 공표는 그 낙인에 마지막 못을 박는 자리가 될 터였다. 사람들은 그녀가 무너지는 모습을 볼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입안이 씁쓸했다.
서은채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 앞으로 걸어갔다. 옷장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은은한 라벤더 향이 흘러나왔고, 시녀들이 준비해둔 무난한 색의 드레스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옅은 하늘색, 차분한 회색, 성녀의 상징에 가까운 은백색. 모두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 눈에 띄지 않고 순응하는 방식을 대변하는 색들이었다. 손끝이 그 옷들을 하나하나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가장 깊숙한 곳, 거의 손이 닿지 않는 자리에 걸려 있던 짙은 붉은빛 드레스 앞에서 멈춰 섰다.
그것은 예전에 어느 무도회를 위해 맞췄다가 결국 한 번도 입지 못한 옷이었다. 핏빛에 가까운 그 색은 성녀의 흰 예복과는 전혀 다른, 오히려 도전적으로 보일 만큼 강렬한 색이었다. 옷자락을 손으로 쓸어보니 매끄러운 비단의 감촉이 손바닥 전체로 퍼졌다. 서은채는 잠시 그 앞에 서서, 이 옷을 입었을 때 사람들이 지을 표정을 상상해보았다. 놀란 얼굴들, 수군거림, 그리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며 걸어가는 자신의 모습.
"오늘은 성녀도, 영애도 아닌 모습으로 가겠어."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드레스를 꺼내 몸에 대어보자, 붉은빛이 촛불 아래에서 더욱 짙어 보였다. 마치 스스로 타오르는 불꽃처럼. 서은채는 그것을 걸치고 다시 화장대 앞에 앉아 마지막으로 귀걸이를 걸었다. 은빛 귀걸이가 붉은 드레스 옆에서 차갑게 반짝였고, 그 대비가 이상하게도 마음에 들었다.
거울 속의 자신을 다시 바라보았을 때, 서은채는 처음으로 그 두 얼굴이 겹쳐지는 것을 느꼈다. 서녀로서의 열등감과 성녀로서의 책임감,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오랜 세월이 마침내 하나의 결단으로 응축되는 순간이었다. 더 이상 어느 한쪽을 숨기기 위해 다른 한쪽을 지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얼굴이었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한 시간에,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그 규칙적인 리듬만으로도 누구인지 짐작이 가능했다. 강도영이었다.
"준비되셨습니까." 강도영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낮고 담담한 어조였으나, 그 안에는 언제나 일정한 무게가 담겨 있었다.
서은채는 귀걸이를 마저 걸며 대답했다. "준비됐습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가 문 밖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다정함이 아니라, 각오였다. 붉은 드레스 자락이 발목을 스치며 서걱이는 소리를 냈고, 그 소리마저 오늘 밤을 위한 서곡처럼 느껴졌다.
*오늘 밤, 나는 더 이상 숨지 않겠다.*
서은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촛불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며 벽에 긴 그림자를 그렸고, 그 그림자는 마치 뱀이 몸을 일으키는 형상처럼 느릿하게 늘어졌다가 다시 사라졌다. 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발걸음에는 더 이상 주저함이 없었다. 문고리를 잡은 손끝이 차가웠으나, 그 냉기마저 오늘은 낯설지 않았다.
문 너머, 왕궁으로 향하는 밤의 초입에서 이미 무언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