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궐의 연회장은 이경이 지나자 더욱 붐볐다. 처마 끝에 매달린 등롱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불빛이 규수들의 옷자락 위로 물결처럼 번졌는데, 그 화려한 빛무리 아래에서도 사람들의 눈은 결국 한곳으로만 모여들었다. 세자 이강윤이 상석에 자리하고, 그 곁에 왕자 이강민이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광경이었다. 규수들은 저마다 곁눈질로 그 자리를 살피며 옷매를 다시 다듬었는데, 궐의 연회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 누구의 옷깃이 더 곱고 누구의 몸짓이 더 단정한지, 그 미세한 차이 하나가 앞으로의 혼사와 가문의 격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으니, 규수들의 손끝은 쉴 새 없이 떨렸다. 그 시선들 속에서 유독 도드라지는 이가 하나 있었다. 이수아였다.
그녀는 다른 규수들과 달리 화려함보다 단정함을 앞세워, 은은한 연분홍 저고리에 소박한 장신구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 절제된 차림이 오히려 좌중의 시선을 붙잡는 효과를 냈다. 화려한 옷이 넘쳐나는 자리에서 소박함은 오히려 눈에 띄는 법이었다. 서연은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언니가 이런 자리를 위해 지난 몇 달을 얼마나 정교하게 준비했는지 새삼 실감했다. 옷의 색을 고르는 데 사흘, 장신구를 고르는 데 이틀, 걸음걸이를 다듬는 데는 얼마나 걸렸을까. 서연은 그런 계산을 하다가 스스로 헛웃음을 지었다. 언니를 이렇게 셈해보는 것조차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렸구나.
"오라버니, 여기 계셨군요." 수아가 이현민을 발견하고 다가가며 목소리를 낮추었는데, 그 목소리에는 궐 안 사람들이 들을 만큼의 부드러움이 정확히 담겨 있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딱 그만큼의 음량이었다. 현민이 짧게 답하는 사이, 수아의 시선은 자연스레 서연에게로 옮겨졌다. "서연이도 왔구나. 다행이다, 혼자 두면 걱정했는데." 그 말은 주변 몇몇 규수들의 귀에 들어갈 만큼 컸는데, 그 자리에 있던 이들 중 몇은 곧바로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걱정이라는 단어 하나가 어떤 의미로 번역되어 퍼져 나갈지, 서연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언니 없이는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아이, 그런 이야기가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몇 개의 입을 거쳐 몇 배로 부풀 것이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서연이 담담히 답하며 수아를 마주 보았다. 그 짧은 대답에도 수아는 순간 눈매가 가늘어졌는데, 그것은 반박당했다는 불쾌함이었으나 곧바로 슬픈 낯빛으로 바뀌어 사라졌다. 그 전환이 얼마나 매끄러운지, 처음 보는 이라면 방금 스친 표정을 착각이라 여길 정도였다. "그래, 네가 늘 그렇게 강한 아이라는 걸 알지." 수아가 나직이 말하며 옅게 웃었다. 강하다는 말이 이 자리에서는 곧 '언니를 신경 쓰지 않는 냉정한 동생'으로 들릴 것이라는 사실을, 서연은 뒤늦게가 아니라 그 순간 즉시 깨달았다.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여기서 또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런 식이었다. 언니는 늘 상대를 먼저 걱정하는 말을 골랐고, 서연이 그 걱정을 거절하면 그 거절 자체가 냉정함의 증거가 되었다. 반박하면 반박한 대로, 침묵하면 침묵한 대로 이야기는 만들어졌다. 서연은 그 구조를 몇 년 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주변 규수들의 시선이 벌써 서연의 표정을 살피며 무언가를 읽어내려 하고 있었다.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대화를 끊었다. "온성가 자매분들이시군요." 세자 이강윤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다가온 것은 왕자 이강민이었다. 검을 다루는 손이라던 소문과 달리 그의 태도는 침착했고, 눈빛은 유난히 관찰하듯 서연과 수아를 번갈아 살폈다. 소문이란 늘 절반만 맞는 법이었다. "두 분 다 소문이 자자하십니다." 강민의 말에 수아는 재빨리 겸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소문은 늘 과장되는 법이지요, 저는 그저 동생을 아끼는 언니일 뿐입니다." 그 매끄러운 대답에 좌중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서연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속으로 짧게 웃었다. 언니가 궐에서까지 저 대사를 연습해 왔구나. 몇 번이나 되풀이했을까, 저 문장을 완벽하게 만들기까지.
강민의 시선이 서연에게로 옮겨 왔다. "이서연 아가씨는 어떠십니까. 소문대로 그렇게... 강단이 있으신지." 그 물음에는 조롱이 아니라 순수한 궁금함이 담겨 있었는데, 서연은 그 눈빛에서 이 사람이 소문을 그대로 믿는 부류가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다른 이들의 시선과는 결이 달랐다. 관찰하되 단정 짓지 않는 눈, 그런 눈을 이 궐 안에서 마주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강단이 있다기보다는, 그저 할 말을 참는 데 익숙할 뿐입니다." 서연이 짧게 답하자, 강민의 입가에 처음으로 얕은 웃음이 스쳤다. 그 반응이 예상 밖이었는지 수아의 얼굴에서 순간 미소가 흐트러졌다. 아주 짧은 균열이었지만, 서연은 분명히 보았다.
"참는 데 익숙하다는 것도 결국 강단이지요." 강민이 덧붙이며 말했다. 그 말에 수아가 빠르게 끼어들었다. "서연이는 어릴 때부터 그랬답니다. 워낙 속이 깊어서 말이지요." 겉으로는 칭찬처럼 들리는 문장이었으나, 서연은 그 속에 숨겨진 다른 의미를 놓치지 않았다. 속이 깊다는 말은 곧 속을 알 수 없다는 말로 번역될 것이었다. 언니의 말에는 늘 두 개의 층이 있었다. 겉의 다정함과 안의 날카로움. 서연은 이제 그 구분을 굳이 애쓰지 않고도 해낼 수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연회장 저편에서 낮은 소란이 일었다. 상석 가까이에서 술상이 뒤엎어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비명 섞인 외침이 들려왔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등롱 불빛이 흔들리는 방향으로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가는 모습이, 마치 바람에 쓰러지는 갈대 같았다. "이서연 아가씨가 시비를 밀쳤습니다!" 누군가의 외침이 연회장을 가로질러 퍼졌고,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좌중의 눈은 다시 서연에게로 못 박히듯 쏠렸다.
서연은 그 순간까지도 수아와 강민 곁을 떠난 적이 없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손끝은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냉기로 저려 왔다. 몸은 여기 있었는데 소문은 벌써 저 너머에서 완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 수아의 입가에 아주 잠시 스쳐 지나간 미소를, 서연은 분명히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