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궁에서 연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온성가에 전해진 것은 정월이 막 지난 무렵이었다. 해마다 정초가 지나면 왕실은 각 가문의 규수들을 궐로 불러들여 하루 저녁 회연을 베푸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는 겉으로는 새해를 축하하는 자리였으나 실상 세자빈 후보를 가늠하려는 자리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해에는 유독 그 무게가 컸다. 세자 이강윤이 스물세 해를 넘기고도 아직 정혼자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조정 안팎에서는 슬며시 그 배필을 두고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사대부가의 안방마다 이 소식이 오르내리는 속도는 눈이 녹는 속도보다 빨랐으니, 정월의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규수를 둔 집안치고 마음이 들썩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강윤은 어질고 학문에 밝다는 평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이현민과는 어릴 적부터 함께 학문을 나눈 벗이었는데, 두 사람 사이의 오랜 친분 때문에 온성가는 늘 궁의 소식에서 한 발 앞서 있었다. 그러나 그 앞섬이 늘 이로운 것만은 아니었으니, 소식이 빠른 만큼 기대도 빠르게 자라났고, 기대가 자라는 만큼 실망도 빠르게 다가올 수 있는 법이었다. 반면 그 아래 왕자 이강민은 형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 왕위 계승을 스스로 내려놓고 무관의 길에 들어선 인물이었다. 검을 쥔 손이 학문보다 익숙하다는 그를 두고 사교계에서는 아쉬움 섞인 평을 내놓았으나, 강민 자신은 그런 시선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형제가 이토록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서로를 헐뜯는 말 한 마디 오가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서는 더 신기한 이야깃거리가 되곤 했다.
온성가의 자매들에게 이 연회는 곧 전쟁터였다. 장녀 이현주는 벌써부터 새 비단을 재촉하며 시비들을 다그쳤고, 며칠이나 걸려 겨우 마음에 드는 빛깔을 골라내고서도 다시 무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되돌려 보내기를 거듭했다. 차녀 이지원은 연회에서 눈에 들 만한 남자가 있을지를 궁리하며 들떠 있었는데, 그 궁리라는 것이 실은 세자보다는 그 곁을 스칠 만한 다른 집안의 셋째 아들이나 넷째 아들에게로 향해 있다는 것을 자매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보다 이 연회를 벼르고 있던 사람은 셋째 이수아였다. 지난 몇 달간 쌓아 온 '천사 같은 언니'라는 평판을 궐 안까지 완벽하게 들고 들어갈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그 평판은 저잣거리의 소문에서부터 시작해 이제는 사대부가 안방마다 오르내리는 이야깃거리가 되어 있었으니, 셋째 아씨의 인자함이 어쩌고 하는 말들이 모여 하나의 작은 전설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서연이도 함께 가야 하지 않겠니." 아버지 이정헌이 지나가는 말로 그렇게 이르자, 수아는 곧바로 상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요, 아버님. 서연이도 함께 가면 좋겠어요. 언니로서 마땅히 데리고 가야지요." 그 말에 담긴 계산을 눈치챈 사람은 오직 서연뿐이었다.
서연은 궐에 가고 싶지 않았다. 등롱 아래 늘어선 규수들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가 무엇으로 쓰일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좌의정의 막내딸이 연회에 불참하는 것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소문의 씨앗이 될 것이었으므로, 결국 서연은 무거운 걸음으로 준비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소영이 밤늦도록 서연의 저고리를 손질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가씨, 무섭지 않으십니까?" 바늘이 옷깃을 오가는 소리만이 방 안을 채우는 가운데, 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무서운 건 아니에요. 다만 귀찮은 것이지." 그 대답에 소영은 픽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 웃음 속에는 이 저택에서 오직 소영만이 알고 있는 서연의 진짜 성정에 대한 안도가 섞여 있었다. "그리 말씀하시는 아가씨가 계셔서 이 소영은 밤일이 편합니다." 소영의 너스레에 서연도 결국 옅게 웃고 말았다.
연회가 열리는 날, 궐 안의 넓은 마당에는 곳곳에 등롱이 걸려 있었고, 그 불빛이 화려하게 어우러진 단청 아래에서 규수들의 비단옷 색이 저마다 눈을 어지럽혔다. 붉은빛과 남빛과 자줏빛이 뒤섞여 흔들리는 그 광경은 마치 정원 가득 핀 꽃을 밤중에 억지로 피워낸 듯했다. 서연은 화려한 색을 피해 연한 옥색 저고리를 택했는데, 그것이 눈에 띄지 않으려는 그녀만의 방식이었다. 짙은 빛깔 사이에서 홀로 옅은 빛을 두르고 서 있는 것이 오히려 더 도드라져 보일 수도 있었으나, 서연은 그런 계산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 자리를 무사히 지나 집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면 충분했다.
오라비 이현민이 잠시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낮게 일렀다. "오늘은 그냥 조용히 있다 오면 된다." 세자와 오랜 벗이라는 그의 위치 덕에 궐 안 사람들이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통에, 현민은 서연에게 오래 붙어 있을 수가 없었다. "저쪽에 아버님이 계시니 무슨 일이 있으면 소영을 통해 알리렴." 그 말을 남기고 현민이 자리를 뜨자, 서연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서연이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지난 몇 해간 온성가에서 살아오며 익힌 유일한 재주가 바로 그것이었으니, 있는 듯 없는 듯 지나가는 것.
그러나 조용히 있으려는 마음과, 조용히 있게 두려는 세상의 마음은 언제나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서연이 마당 한구석 기둥 그늘에 몸을 반쯤 숨기고 서서 등롱의 불빛이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 저편에서 화려한 자태로 다가오는 이수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순간, 서연은 오늘 밤이 결코 조용히 지나가지 않을 것임을 예감했다. 수아의 걸음걸이에는 이미 누군가에게 보여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특유의 여유가 배어 있었고, 그 뒤로는 벌써 몇몇 규수들이 소곤거리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등롱의 불빛이 수아의 얼굴 위에서 유난히 곱게 부서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