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비밀 상자를 발견한 지 이틀이 지났다. 유하는 그 이틀 동안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세아와 함께 촛불 하나를 가운데 두고 흐려진 잉크의 흔적을 하나하나 따라가 봤지만, 남은 글자는 너무 적었고 의미는 좀처럼 이어지지 않았다.
"이 글자, 혹시 '금'이 아닐까요?" 세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종이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물었다.
"아니, 이건 '숲'인 것 같은데." 유하가 고개를 저었다.
"둘 다 아닐 수도 있죠." 세아가 한숨을 내쉬며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 한숨에는 이틀간 쌓인 피로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촛불이 두 번이나 다 타서 새로 갈아 끼워야 했을 만큼 오랜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종이 위의 글자들은 여전히 낱개로 흩어진 조각처럼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결국 둘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이 종이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
'정공법으로 가야겠어.' 유하는 결국 다른 방향을 택하기로 했다.
하윤성에게 직접 준서의 처우 개선을 요청하는 것. 위험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 상황에서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였다.
"정말 하시려는 겁니까." 세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목소리에는 말리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냥 의원을 더 붙여달라고 청하는 거야." 유하가 담담히 대답했다. 스스로도 확신이 부족한 어조였다.
"그냥, 이라고 하셨지만." 세아가 팔짱을 끼며 유하를 바라보았다. "세자 저하 앞에서 '그냥'이라는 말이 통할 리가 없잖습니까."
유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세아의 말이 옳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알현을 청하는 데는 절차가 필요했다. 세아를 통해 궁의 시종에게 서신을 넣었고, 답을 기다리는 며칠은 유하에게 유독 길게 느껴졌다.
첫날은 아무 답도 오지 않았다. 둘째 날도 마찬가지였다. 유하는 혹시 서신이 잘못 전달된 게 아닌가 하는 불안에 방 안을 몇 번이나 서성였다.
'거절인가.' '아니면 그냥 무시하는 건가.'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오갔다. 잠깐씩 눈을 붙였다가도 그 생각에 다시 눈이 떠졌다.
그러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 시종이 다급히 찾아와 초청을 알렸다. 하윤성의 처소로 오라는 전언이었다.
유하는 서둘러 채비를 했다. 세아가 옷매를 다듬어주며 낮게 속삭였다.
"말씀은 최대한 짧게, 그리고 예의를 갖추셔야 합니다. 저하의 성격을 잊으신 건 아니시죠?"
"잊을 리가." 유하가 씁쓸하게 웃었다.
마차에 오르는 짧은 순간에도 세아는 몇 번이나 옷깃을 바로잡아주며 잔소리를 더했다. 그것이 걱정을 표현하는 세아 나름의 방식이라는 걸, 유하는 이미 알고 있었다.
***
방에 들어서자 하윤성은 서류를 살피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붓을 내려놓는 손끝이 유독 느긋했다.
"그대가 직접 청을 넣을 줄은 몰랐군." 그의 목소리에는 흥미와 경계가 반씩 섞여 있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유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들어보지." 하윤성이 팔짱을 끼며 앉았다. 그 자세만으로도 방 안의 공기가 팽팽해지는 것 같았다.
유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며칠간 준비한 말들이 순간 머릿속에서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손끝이 저도 모르게 옷자락을 살짝 움켜쥐었다.
***
"호위무사 준서의 치료를 위해 왕실 의원을 붙여주셨으면 합니다." 유하가 또박또박 말했다.
하윤성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그자를 위해서, 왕실 의원을." 낮게 되묻는 목소리에 냉기가 서려 있었다.
"제 목숨을 구한 사람입니다." 유하가 물러서지 않고 답했다.
"그건 그자의 임무였을 뿐이오." 하윤성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그런 청을, 나에게 이렇게 대놓고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오?"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유하는 그 눈빛에서 처음 마주했던 날의 서늘함을 다시 느꼈다.
"저는 단지." 유하가 말을 잇으려 했지만, 하윤성이 손을 들어 막았다.
"됐소."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소. 그대는 신경 쓸 필요 없소."
"저하." 유하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지만, 하윤성은 이미 등을 돌린 뒤였다.
"물러가시오."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의 대화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유하는 그 자리에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뭐라도 더 말을 붙여볼까 싶었지만, 하윤성의 등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그 어떤 말도 허락하지 않았다.
***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유하는 아무런 확답도 얻지 못한 채 처소를 나서야 했다.
'알아서 처리한다는 게 무슨 뜻이야.' 그 말이 오히려 더 불안하게 남았다. 좋은 쪽으로 해석하기에는, 그가 보여준 표정이 너무도 차가웠다.
복도를 걸으며 유하는 자신이 결국 정보가 부족한 채로 움직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나라의 규칙, 세자의 진짜 권한과 성향, 그리고 준서를 둘러싼 진실까지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였다.
지나가던 시종들이 유하를 힐끔거리며 수군거렸다.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벌써 소문이 돈 모양이었다. 유하는 그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세아가 저택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유하의 표정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잘 되셨습니까?"
유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짧지 않았다.
세아는 더 묻지 않았다. 다만 유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나란히 걸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큰 위로가 되었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유하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왕궁의 담벼락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담장 위로 늘어선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
'준서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유하의 시야에서 담벼락이 조금씩 물러났지만, 마음속에서는 그 담이 오히려 점점 더 크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 담 너머,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조용히 움직이고 있다는 예감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예감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유하의 가슴 한구석을 무겁게 짓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