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혼수 3년째, 나는 영애였다

2화

눈을 뜬 곳은 화려한 침실이었다. 비단 이불에서는 옅은 매화 향이 났고,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은 사진에서나 봤을 법한 궁궐 풍경을 닮아 있었다.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 소리가 바람을 따라 딸랑거렸다. 유하는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어지러움을 느끼고 다시 누웠다. 천장의 문양이 낯설었다. 연꽃과 학이 새겨진 문양이었는데, 그 무늬를 눈으로 좇는 사이에도 머릿속에는 두 개의 기억이 동시에 흘러들고 있었다. 하나는 은서의 것이었다. 서울의 좁은 아파트, 이도현의 얼굴, 삼 년간의 병실. 병실의 소독약 냄새와 창밖으로 보이던 회색 건물들까지도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다른 하나는 선유하의 것이었다. 공작가의 외동딸로 태어나 곱게 자란 열아홉 해의 나날들. 유모의 등에 업혀 걸음을 배우고, 아버지의 서재에서 몰래 책을 훔쳐 읽던 기억. 두 개의 삶이 한 몸 안에서 뒤섞여 흐르는 감각은 마치 두 개의 강물이 억지로 한 물길로 합쳐진 것 같았다. '둘 다 진짜야.'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어느 쪽이 원래의 나였는지도 이제는 명확하지 않았다. 유하는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손끝에 닿는 살결은 은서의 것도 선유하의 것도 아닌, 이상하게 낯선 감촉이었다. 방문이 열리며 젊은 여자가 들어왔다. 소박한 옷차림에 단단한 인상이었다. 걸음걸이에는 오래 몸에 익은 절도가 있었다. "아가씨, 정신이 드셨군요." 그녀가 안도한 얼굴로 다가와 이불 끝을 여며주었다. "저는 세아입니다. 아가씨의 전담 시녀입니다." 유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낯선 이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 정리가 안 된 상태였다. 세아라는 이름도, 아가씨라는 호칭도, 전부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 "준서는." 유하가 겨우 물었다. 몸이 저절로 그 이름을 기억해낸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왔다. 입 밖으로 낸 순간 스스로도 놀랐다. 왜 그 이름이 먼저 나온 건지, 이유는 몸이 알고 있는데 머리는 아직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세아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손끝이 이불 위에서 잠시 멈췄다. "오라버니는... 아직 깨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오라버니.' 유하는 그 말에서 세아가 준서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마차 사고 당시 자신을 감싸고 대신 다친 남자, 그리고 그의 동생이 지금 자신을 돌보고 있다는 것이 묘하게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기억 속 사고 장면이 다시 스쳐 갔다. 굴러가는 마차, 튀어 오르는 흙먼지, 그리고 자신을 끌어안고 몸을 던지던 남자의 등. 그 순간의 온도와 무게까지도 몸에 남아 있었다. "많이... 다쳤어?" 유하가 다시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의원들이 말하길, 언제 깨어날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세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담담한 어조였지만 그 안에 눌러 담긴 감정이 느껴졌다. 그녀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머리를 크게 다치셨습니다. 의원들도 이제는...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하시더군요." 유하는 이불을 움켜쥐었다. 이 몸은 선유하의 것이지만, 그날의 사고와 그 남자의 헌신은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남아 있었다. 손끝이 떨렸다. '내가 산 게 저 사람 때문이야.' 그 사실이 무겁게 가슴을 눌렀다.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사람에게 목숨을 빚졌다는 실감이, 시차를 두고서야 천천히 밀려오고 있었다. 세아는 그런 유하의 얼굴을 잠시 살피더니 조용히 자리를 물러났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 밤이 되자 유하는 다시 잠들었고, 꿈속에서 병실 풍경이 떠올랐다. 형광등 불빛, 삐 소리를 내는 기계, 그리고 창밖으로 지나가는 구급차의 불빛까지도 선명했다. 이도현의 얼굴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병실을 찾아왔을 때의 표정, 지친 눈빛과 억지로 지어 보이던 웃음. 정미란의 목소리도 들렸다. "은서야, 조금만 더 버텨." 그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었는지 모른다. 삼 년이라는 시간의 무게가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왜 아직도 기억이 다 있는 거지.' 눈을 뜨고 나서도 이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뜬 채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유하는 몇 번이나 같은 물음을 되새겼다. 전생의 기억을 온전히 간직한 채 환생했다는 것.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이상한 능력이라면, 그 능력에는 분명한 한계도 있어야 했다. 기억은 또렷했지만 감정이 격해질 때만 더 선명하게 떠올랐고, 평소에는 흐릿한 그림자처럼 뒤에 물러나 있었다. 마치 두 개의 서랍 중 하나는 늘 잠겨 있고, 감정이 흔들릴 때만 그 서랍이 살짝 열리는 것 같았다. '그럼 이건 뭘 위한 걸까.' 답을 알 수 없는 물음이 계속 쌓여만 갔다. 유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가, 답답함을 느끼고 다시 걷어냈다. 방을 채운 어둠 속에서 창밖의 달빛만이 유일한 빛이었다. *** 다음 날, 세아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소식을 전했다. 아침상을 물리기도 전에 조심스레 다가와 말을 꺼낸 걸 보면 꽤 신경 써서 고른 시점인 듯했다. "세자 저하께서 아가씨의 안부를 물으셨습니다." "세자?" 유하가 되물었다. 선유하의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던 이름이었다. 하윤성. 자신의 약혼자. "명성이 자자하신 분입니다. 관대하고 사려 깊으시다고... 아가씨께서도 늘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세아의 말에는 어떤 확신이 담겨 있었지만, 유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선유하의 기억 속에서조차 하윤성이라는 이름은 이상하게 흐릿했다.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았고, 함께 나눈 대화도 몇 마디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그 부분만 지워놓은 것 같았다. "내가... 그를 자주 만났어?" 유하가 물었다. "약혼 이후로는 자주 서신을 주고받으셨습니다. 다만 직접 뵌 적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세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이상하게도 아가씨께서는 저하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안 하셨습니다." 유하는 그 대답에서 뭔가 이질감을 느꼈다. 약혼자에 대한 기억이 흐릿한 것도 이상했지만, 그 흐릿함 뒤에 뭔가가 의도적으로 감춰져 있는 느낌이었다. '뭔가 있어.' 근거 없는 예감이었지만, 그 예감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유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원 너머 어딘가에서, 아직 얼굴도 모르는 세자가 자신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반갑기보다는, 왠지 서늘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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