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날 밤, 유하는 다시 꿈을 꾸었다.
병실의 하얀 불빛부터 시작이었다. 소독약 냄새가 코끝에 스치고, 창밖으로는 도시의 불빛이 무심하게 흘러갔다. 이도현의 잠든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삼 년 동안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던, 그 평온하면서도 낯선 얼굴이었다.
정미란의 목소리가 그 위로 겹쳐졌다. "여전히 반응이 없어요." 담담한 그 말투가 유하의 심장을 매번 후벼 팠다. 삼 년 동안 셀 수 없이 들었던 문장이었지만, 익숙해진다고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삼 년의 시간이 통째로 눈앞에 펼쳐졌다. 처음 병원에 도착했던 그날의 절망, 매일 아침 병실 문을 열 때마다 느꼈던 실낱같은 희망, 그리고 그 희망이 매번 무너지던 밤들까지.
'다시 한 번 같은 자리에 서 있어.' 눈을 떴을 때, 유하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이불을 걷어차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깨울 수 없던 사람을 지켜보기만 했던 삼 년.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거리에서, 그저 숨소리만 확인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던 시간이었다. 그 무력함을 이번에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가슴 깊은 곳에서 단단해졌다.
'이번엔 다르게 할 거야.' 유하는 준서를 반드시 깨우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번엔 그저 지켜보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
다음 날 아침, 유하는 세아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오라버니의 처소를 볼 수 있을까."
세아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눈을 크게 뜨고 유하를 바라보는 그 얼굴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아가씨가 갑자기 왜 오라버니의 방을 보고 싶어 하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눈치였다.
"오라버니 처소에는 아무것도 없을 텐데요." 세아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래도 보고 싶어." 유하의 목소리에는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
세아는 잠시 고민하는 듯 입술을 깨물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저택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침 햇살이 마당을 비추고 있었지만, 유하의 마음은 그와는 다른 색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준서의 처소는 저택 뒤편, 호위무사들이 머무는 낮은 건물이었다. 다른 방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외양이었지만, 문 앞에 서니 이상하게 손이 떨렸다.
방은 단출했다. 검 한 자루가 벽에 걸려 있었고, 정리된 옷가지가 한쪽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낡은 나무 상자 하나가 방 한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건 뭐지." 유하가 상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상자는 특별한 장식도 없이 낡고 투박했지만, 어딘가 묘하게 시선을 끌었다.
"글쎄요." 세아의 목소리에 궁금함이 섞였다. "오라버니가 늘 자물쇠를 걸어두던 것입니다. 저도 안에 뭐가 있는지 본 적이 없어요."
"한 번도?" 유하가 되물었다.
"네. 손도 대지 못하게 했으니까요." 세아가 상자를 내려다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게 여기긴 했지만, 오라버니 성격이 워낙 그러니 그냥 넘겼습니다."
***
상자는 잠겨 있었지만, 세아가 오래전 준서에게 받은 열쇠를 기억해냈다. 서랍 깊숙한 곳에서 작은 열쇠를 꺼내는 세아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걸 왜 저한테 맡겼는지 몰랐는데." 세아가 중얼거렸다. "설마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던 걸까요."
낡은 열쇠가 자물쇠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딸깍,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렸다.
그 짧은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갈랐다. 유하와 세아는 동시에 숨을 죽였다.
안에는 여러 장의 종이가 접혀 있었다. 오래된 종이 특유의 색이 누렇게 바래 있었고, 접힌 자국마다 세월의 흔적이 짙었다. 유하는 그중 하나를 펼쳤다. 낯선 필체로 쓰인 글이었지만, 내용은 또렷했다.
'세자 저하의 언행에 관한 기록.' 첫 줄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게 대체 뭐야.' 유하의 손끝이 종이를 쥔 채로 굳었다.
종이에는 날짜별로 짧은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궁 안에서 벌어진 몇몇 사건들, 그리고 하윤성이 관련된 일들이 조심스러운 표현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어떤 문장은 단 한 줄이었고, 어떤 문장은 몇 줄에 걸쳐 이어졌다.
"이게... 오라버니가 왜 이런 걸." 세아가 종이를 받아 들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종이를 넘기는 손끝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오라버니가 언제부터 이런 걸 적었던 거지." 유하가 물었지만, 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하는 상자 바닥에 깔린 마지막 종이를 마저 펼쳤다. 그곳에는 짧은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만약 내가 없을 때, 아가씨를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다면.'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유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 밑으로 몇몇 이름과 장소가 적혀 있었지만, 잉크가 흐려져 절반은 알아볼 수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봐도, 몇 글자는 완전히 뭉개져 형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 글자는 뭐지." 유하가 손끝으로 흐려진 부분을 짚었다. "여기, 이 이름 같은데."
"저도 못 알아보겠어요." 세아가 종이를 유하의 손에서 받아 들고 빛에 비춰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
"오라버니가 뭔가 알고 있었던 걸까요." 세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종이를 쥔 손이 여전히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유하는 종이를 조심스럽게 다시 접었다. 준서가 이런 기록을 남겨둔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는 하윤성을 경계하고 있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은 거야.' 유하는 속으로 준서를 향해 물었다. 답을 들을 수 없는 물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마음이 그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게 은신처가 될 수도 있어.' 상자 하나가 갑자기 두 사람에게 유일한 발판처럼 느껴졌다. 궁 안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다는 걸 절감한 순간이었다.
"세아." 유하가 조용히 말했다. "이건 우리만 알고 있어야 해."
"네?" 세아가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이게 오라버니가 남긴 증거라면..."
"아직은 아니야." 유하가 종이를 상자 안에 다시 넣으며 말했다. "누구를 믿을 수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이니까."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눈빛에는 두려움과 결의가 동시에 섞여 있었다. 상자를 다시 닫는 손끝이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워 보였다.
유하는 상자를 품에 안았다. 나무의 낡은 질감이 손바닥에 닿았지만, 그 무게는 단순한 나무 상자의 무게가 아니었다. 준서가 남긴 마지막 흔적이자, 앞으로 두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의 시작이었다.
'이 이름들이 누구인지 알아내야 해.' 유하는 흐려진 잉크 자국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 안에 적힌 몇 글자가, 어쩌면 지금 이 저택 안에도 숨어 있는 위협의 실마리일지 몰랐다.
방을 나서기 전, 유하는 마지막으로 준서의 검을 바라보았다. 주인을 잃은 채 벽에 걸려 있는 그 검이, 오늘만큼은 유독 쓸쓸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