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날 이후로 서윤은 부쩍 신경이 곤두선 채로 하루를 보냈다. 한소이의 웃는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릴 때마다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는데, 그것이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라 전생의 기억이 되살아나며 생긴 두려움이라는 걸 서윤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밥을 먹다가도 문득 손목의 그 붉은 자국이 떠올라 숟가락을 내려놓았고, 잠자리에 들어서도 눈을 감으면 어린 하윤이 흐느끼던 마지막 순간이 겹쳐 떠올랐다. 딸을 지키겠다고 다짐했지만, 대체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법은 아직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저 아이 손목에 남은 자국 하나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증거도 없고, 목격자도 없고, 심지어 이하윤 본인조차 감싸려 드는데. 이럴 때 필요한 건 눈물이 아니라 계획이라는 걸, 서윤은 술을 끊은 뒤로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오후, 서윤은 응접실에서 뜻밖의 손님을 맞았다. 시녀가 다급한 걸음으로 들어와 손님이 오셨다는 말을 전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며 익숙한 향수 냄새가 먼저 방 안을 채웠다.
"오랜만이야, 서윤."
문을 열고 들어온 여인은 설원 공작가의 령녀 윤소혜였는데, 화사한 미소와 시원스러운 걸음걸이가 예전 그대로였다. 새하얀 드레스 자락이 걸을 때마다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물결처럼 흔들렸고, 밝은 갈색 눈동자는 여전히 장난기로 가득했다. 전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변함없이 밝은 사람이었다.
"소혜야…… 여긴 어떻게."
"어떻게라니, 친구가 요즘 좀 이상하다는 소문이 돌아서 와봤지. 술을 끊었다며? 사람이 아주 딴사람이 됐다고들 하더라고."
소혜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소파에 털썩 앉았지만, 서윤을 바라보는 눈빛만은 진지했다. 서윤은 그 눈빛에서, 이 친구가 단순히 안부 인사를 하러 온 게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하녀가 내온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소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봐. 무슨 일이야. 네가 이렇게 넋 놓고 있는 거, 나 처음 봐."
서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며 속내를 조금 털어놓았다.
"소혜야, 하윤이 손목에서 이상한 자국을 봤어. 소이가 한 짓 같은데, 확신할 수도 없고, 하윤이도 말을 안 하려 해."
그 말을 듣는 순간 소혜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방금까지 장난기로 가득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소이라면, 한서인의 그 딸? 겉으로는 순한 척하면서 뒤로는 사람 괴롭히기로 유명하다던데. 우리 왕궁 시녀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있어."
서윤은 그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전생에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그 악의가, 사실은 이미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술에 취해 아무것도 몰랐지. 자책이 목까지 차올랐다. 손끝이 저절로 찻잔을 꼭 쥐었고, 도자기 표면의 서늘한 감촉이 오히려 마음을 더 어지럽게 했다.
"어떤 소문인데. 자세히 말해줄 수 있어?"
"별거 아닌 것처럼 넘기는 게 문제야. 몇 번, 다른 아이들 물건이 없어졌다가 다시 나타났다거나, 넘어져서 다쳤는데 하필 그 옆에 소이가 있었다거나…… 다들 그냥 우연이겠지 하고 넘기더라고. 나도 처음엔 그랬고."
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우연이라는 말로 넘어간 일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전생에서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다들 우연이라고, 아이들 사이의 다툼이라고 웃으며 넘겼을 것이고, 그 끝에 하윤이 있었다.
자책이 계속되자, 소혜가 손을 뻗어 서윤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을 이었다.
"자책할 시간에 대책을 세워. 넌 이제 그럴 수 있는 사람이잖아."
그 말이 서윤의 가슴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그럴 수 있는 사람. 전생에는 그저 술잔을 붙잡고 시간을 흘려보내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의 서윤에게는 두 번째 기회가 있었고, 그 기회를 헛되이 쓸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남편은 애초에 신경도 안 쓸 텐데."
서윤이 씁쓸하게 중얼거리자, 소혜는 팔짱을 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공작 각하한테 기대지 마. 애초에 그 사람은 자기 애인 딸이 뭘 하든 못 본 척할 사람이잖아. 대신, 네가 직접 하윤이 곁을 지키는 방법을 찾아야지. 시녀를 하나 붙이거나, 아니면 아예 하윤이랑 같이 다니거나."
소혜의 제안은 단순했지만, 서윤에게는 등불처럼 명확했다. 그래, 남에게 기대지 않고, 내가 직접 지키면 되는 거였어. 시녀를 붙인다 해도 결국 그 시녀가 소이의 눈치를 보게 될 게 뻔했다. 이 저택 안에서 한서인의 권력은 명목상의 부인인 서윤보다 훨씬 크게 작용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것.
* * *
그날 저녁, 서윤은 이하윤의 방으로 찾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방문을 두드리는 손끝이 미묘하게 떨렸는데, 혹시라도 딸이 거절할까 봐, 혹은 자신이 참견한다고 여길까 봐 두려운 마음이 앞섰던 탓이었다.
"하윤아, 내일부터 언니를 만날 때 나도 같이 있어도 될까?"
이하윤은 놀란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곧 안도한 듯 눈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그, 그래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 대답 속에 담긴 안도감이 서윤의 눈에도 선명하게 보였고, 그녀는 딸의 머리를 쓸어주며 다짐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감촉이, 마치 이 아이를 이번 생에서는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각오를 몸으로 새기는 것 같았다.
"이제 언니랑 있을 때 무서운 일 있으면, 꼭 나한테 말해줘. 알겠지?"
"……네."
작은 목소리였지만, 예전보다 훨씬 또렷했다. 서윤은 그 조금의 변화에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렇게 조금씩, 이 아이가 마음의 문을 열어주고 있구나.
하지만 안심하기엔 아직 일렀다. 다음날, 서윤이 하녀에게 오늘 일정을 묻던 중,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마님, 오늘 오후에 왕태자 전하께서 방문하신다는 전언이 왔습니다. 월현 자작 영애님과 함께 정원을 산책하실 예정이라고……."
서윤의 손끝이 순간 얼어붙었다. 찻잔을 들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고, 심장이 쿵, 하고 무겁게 내려앉는 소리가 귓속에서 울렸다.
정하람. 전생에서 이하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 이름이, 지금 이 순간 이토록 가볍게, 아무 일도 아닌 듯 저택 안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