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두 번째 삶, 딸을 위해

2화

아침 식사 자리는 낯설도록 조용했다. 커다란 창을 통해 스며드는 아침 햇살이 식탁 위에 옅은 금빛 무늬를 그리고 있었지만, 그 온기와는 상반되게 식탁 위에는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서윤은 식탁 맞은편에 앉은 이하윤을 흘깃거리며 수프를 뜨는 시늉만 했는데, 실은 딸의 얼굴을 눈에 담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마른 뺨, 그늘진 눈매, 자세히 보니 소매 끝이 유난히 낡아 있었는데, 청하 공작가의 영애치고는 지나치게 초라한 차림이었다. 소매 끝단이 몇 번이나 덧대어 기운 흔적을 보고 있자니, 이 아이한테 옷 하나 제대로 지어 입히지 않았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며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솟았다. 전생의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생각하다가 서윤은 저도 모르게 숟가락을 세게 내려놓았고, 그 소리에 이하윤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뭘 잘못……." "아니, 아니야.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 서윤은 급히 손을 내저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냥, 네 소매가 낡았구나 싶어서. 오늘 재봉사를 불러 새 옷을 몇 벌 지어야겠다." 말을 하면서도 서윤은 속으로 계산을 했다. 청하 공작가의 재산이라면 옷 몇 벌 짓는 데 인색할 리 없을 텐데, 대체 왜 지금까지 방치되어 있었던 걸까. 술병을 끌어안고 방문을 걸어 잠그던 전생의 자신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하윤은 그 말에 오히려 더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포크를 든 손이 허공에서 잠시 멈추더니, 이내 무릎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어머니가, 그것도 몇 년째 술병만 끌어안고 지내던 어머니가 자신의 소매 상태를 신경 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서윤은 그 표정을 보며 가슴 한 켠이 아려왔다. 얼마나 무심했으면, 이 아이가 어머니의 관심조차 저렇게 낯설어할까. 하지만 곱씹어봐야 소용없는 회한이었다. 지금부터 채워나가면 될 일이었다. 그때 회랑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고, 청하 공작 선우현이 서류를 손에 든 채로 식당에 들어섰다. 검은 예복이 흐트러짐 없이 그의 몸에 딱 맞아떨어졌고, 걸음마다 서류를 넘기는 손끝이 무심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잘 그려진 초상화 속 인물처럼 정제되어 있었다. 서윤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묘하게 담담해진 자신을 발견했다. 전생 같았으면 심장이 요동치며 그의 눈길 한 번을 갈구했을 텐데, 지금은 그저 낯선 손님을 보는 것처럼 무심했다. 아, 이것도 나쁘지 않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오늘 일찍 나오셨군." 선우현이 서윤을 향해 짧게 인사했지만, 그 눈길은 곧 이하윤 쪽으로 옮겨가며 형식적인 안부를 물었다. "공부는 잘 되고 있느냐." "네, 아버님." 이하윤의 목소리는 유난히 작았고, 시선은 접시 위 수프 그림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짧은 대화가 끝나자 그는 다시 서윤을 향해 건조하게 덧붙였다. "오늘 저녁, 월현 자작 영애와 그 따님께서 오실 예정이오. 예를 갖춰 맞아주시오." 서윤은 숟가락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잠시 숨을 골랐다. 예를 갖춰 맞으라니, 남편의 애인을 제 손으로 환대하라는 뜻이었다. 전생의 자신은 그 말에 술잔을 던지며 울고불고 매달렸었지,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고. 방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을 밟으며 울던 그날의 감촉이 아직도 발바닥에 남아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그녀는 애써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 순간 이하윤이 슬며시 어머니의 소매를 붙잡았는데, 그 조그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선우현이 자리를 뜨고 나서야 이하윤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정말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저번엔……." 저번엔 술병을 던지며 소리를 지르셨잖아요, 라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지만, 서윤은 그 뒷말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괜찮아." 서윤은 딸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낮게 웃었다. 손끝에 닿는 머리카락이 비단처럼 부드러웠는데, 정작 그 밑의 마음은 얼마나 오래 시들어 있었을까 싶어 웃음 끝이 조금 씁쓸해졌다. "이제부턴 그런 일로 소란 피우지 않을 거야. 대신……." 그녀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이하윤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대신 너를 지킬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이하윤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였는데, 정확히 명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뭉클하게 피어올라 목이 메었다. 어머니가 저를 지킨다니, 그런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좀 이상해요." 이하윤이 귀 끝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고, 서윤은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났다. 이렇게 작은 말 한마디에도 이 아이는 얼마나 목이 말라 있었던 걸까, 생각하니 다시 가슴이 저릿해졌다. * * * 저녁, 예고대로 한서인과 한소이가 마차에서 내렸다. 저택 앞마당에 마차가 멈춰 서는 소리, 바퀴가 자갈을 긁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한서인은 화려한 청록빛 드레스를 입고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 옆의 한소이는 대조적으로 수줍은 듯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린 채 조신하게 걷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하지만 서윤은 그 그림 속에 숨은 서늘한 계산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저 아이가 얼마나 능란하게 순진함을 연기하는지, 전생에서 뼈저리게 배운 뒤였으니까. "부인, 오랜만이에요." 한서인이 여유롭게 인사를 건네며 서윤을 훑어보았는데, 그 시선 끝에 미묘한 놀라움이 스쳤다. 예전의 그 넋 나간 여자가 아니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서윤은 담담히 예를 갖춰 인사를 받으면서도, 곁에 선 이하윤의 손을 슬쩍 잡아 자신 쪽으로 당겼다. 그 작은 몸짓 하나에 한소이의 눈매가 아주 잠깐, 날카롭게 좁아졌다가 다시 순한 웃음으로 돌아왔다. 응접실로 자리를 옮기는 짧은 사이에도 한서인은 계속해서 눈으로 저택 곳곳을 훑었는데, 그 시선이 마치 값을 매기는 감정사 같아서 서윤은 저도 모르게 이하윤의 손을 더욱 세게 쥐었다. 이 아이는, 오늘부터 시작이구나. 서윤은 속으로 나직이 되뇌며 딸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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