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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며칠이 더 걸렸는데, 그 며칠 동안 하은은 매일 밤 어머니의 방을 찾아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새로운 습관을 심어 넣었다. 처음 며칠은 그저 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했는데, 강서윤은 딸이 부쩍 자주 찾아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굳이 내치지 않았고, 하은은 그 틈을 놓치지 않으려 매일 밤 같은 시간에 문을 두드렸다. "어머니, 이거 한번 써보세요." 하은이 내민 것은 작은 가죽 수첩이었는데, 하녀에게 몰래 부탁해 구한 것으로, 겉면에는 아무 장식도 없는 평범한 물건이었다. "이게 뭔데?" 강서윤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수첩을 뒤집어 보았고, 새 가죽 표지 위에는 흠집 하나 없이 매끈한 촉감만이 남아 있었다. "오늘 아버지가 하신 일 중에서, 어머니가 마음에 든 것 딱 하나만 적는 거예요. 잘하신 일, 멋있었던 순간, 그런 거요." 강서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수첩을 받아 들었고, 하은은 그 옆에 앉아 첫 페이지를 함께 넘기며 예시를 적어 보였다. '오늘 아버지는 아침에 신문을 3분 만에 다 읽으셨다. 대단하다.' 그런 유치한 문장을 보고 강서윤은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 웃음이 며칠 만에 처음으로 진짜 웃음처럼 보였고, 하은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런 걸 쓰면 뭐가 달라지니?" 강서윤이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물었을 때, 하은은 짐짓 대수롭지 않은 척 대답했다. "그냥, 하루에 딱 하나만 좋은 걸 기억하는 연습이에요. 어머니는 매일 나쁜 것만 기억하시잖아요." 그 말에 강서윤의 얼굴이 순간 굳었지만, 곧 다시 풀어지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고, 그녀는 못마땅한 척하면서도 수첩의 첫 장을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좋아, 반응이 나쁘지 않아.' 그날 이후로 강서윤은 매일 밤 하은과 함께, 혹은 혼자서 그 수첩에 짧은 문장을 적기 시작했고, 그 내용은 대부분 시시콜콜한 것들이었으나 신기하게도 그 문장을 적는 순간마다 강서윤의 얼굴에서 조금씩 긴장이 풀려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어떤 날은 '오늘 아버지가 마차에서 내리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라고 적혀 있었고, 또 어떤 날은 '오늘 아버지가 저녁 식사 중에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꺼내셨다'라고 적혀 있었는데, 그 문장들은 하나같이 사소했지만 강서윤에게는 마치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빗줄기처럼 스며드는 듯했다. 하은은 그 수첩이 쌓여가는 것을 지켜보며 묘한 감정을 느꼈는데, 이것이 단순한 심리 유도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매일 밤 어머니의 얼굴에 스치는 옅은 웃음을 볼 때마다 가슴 한쪽이 뻐근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이게 정말 효과가 있을까……' 의심이 들 때마다 하은은 스스로에게 되물었지만, 강서윤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지는 것을 직접 확인할 때마다 그 의심은 다시 확신으로 바뀌었다. 한편 도현은 그의 몫대로 은밀한 역할을 맡았는데, 후작의 곁을 오가며 시중을 드는 하인들과 안면이 있는 그가, 진혁의 사소한 일상 — 오늘 어떤 옷을 입었는지, 어떤 서류에 서명했는지, 몇 시에 귀가할 예정인지 — 를 슬쩍 전해주는 정보원 역할을 했다. "오늘은 후작님이 새로 맞춘 조끼를 입고 나가셨대." 도현이 그렇게 알려주면 하은은 그 정보를 곧바로 수첩에 적을 소재로 어머니에게 전했고, 강서윤은 마치 신문 기사를 받아본 사람처럼 눈을 반짝이며 그 사소한 소식에 기뻐했다. "조끼 색깔은 뭐였어?" 강서윤이 묻자 도현은 짐짓 곤란한 얼굴로 하은을 바라보았고, 하은은 그 눈빛의 의미를 곧바로 알아채고 웃음을 참으며 대신 대답했다. "짙은 남색이었대요, 어머니. 후작님한테 잘 어울리는 색이라고 하인들도 다들 칭찬했다던데요." 그 말에 강서윤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수첩에 무언가를 적어 넣었는데, 그 짧은 순간 하은은 어머니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눈치채고 말았다. '아직도 저렇게 떨리시는구나……' 애정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였지만, 동시에 그 애정이 얼마나 위태로운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런 걸 대체 어디서 배웠니, 하은아." 강서윤이 신기하다는 듯 묻자 하은은 태연하게 웃어 보이며 대답을 흐렸다. "그냥, 어디선가 본 것 같아요……" 말끝을 흐리며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게 당연하지. 이건 전생의 지식이니까.' 강서윤은 더 캐묻지 않고 그저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는데, 그 손길이 예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는 것을 하은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작은 성공에 안심하기에는 아직 일렀는데, 하은은 게임 시나리오의 다음 분기점이 머지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작에서 강서윤의 파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는, 다름 아닌 왕가에서 주최하는 대규모 연회였고, 그 자리에서 선우 후작이 어떤 여인과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강서윤이 목격하게 되는 장면이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게임 속에서 그 연회는 이른바 '전환점'이라 불리는 이벤트였는데, 이 전환점이라는 것은 주인공의 애정 상대가 다른 인물과의 관계를 확인시켜주는 장면을 통해 히로인의 감정선을 급격하게 뒤흔드는 장치였고, 그로 인해 캐릭터의 심리 상태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었다. 강서윤에게 있어 그 전환점은 곧 몰락의 시작이었는데, 연회에서 진혁이 낯선 여인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목격한 순간부터 그녀의 애정도는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결국 그 감정의 붕괴가 누적되어 화재로 이어지는 최후의 시퀀스가 발동되는 것이었다. '그 연회가 곧 열릴 거야.' 하은은 손끝으로 수첩의 표지를 가만히 쓸어보며, 도현에게 그 연회에 대해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저편에서 낯익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집사의 발걸음이었는데, 평소와 달리 다급한 기색이 느껴졌고, 그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며 응접실 앞에서 멈추어 섰다. 하은은 그 발소리의 리듬만으로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소식이 도착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평소 집사의 걸음은 늘 일정하고 차분했으나 지금 들려오는 소리는 미묘하게 빠르고 불규칙했기 때문이었다. '왜 저렇게 급하게……' 그는 하은과 강서윤이 있는 응접실 문을 두드리며 조심스럽게 알렸다. "부인, 후작님께서 다음 주 왕궁 연회에 함께 참석하라는 서신을 보내오셨습니다." 그 말에 강서윤의 손에 들려 있던 수첩이 스르르 떨어졌고, 놀란 눈으로 집사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반가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스치고 있었으며, 하은은 그 표정을 보며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강서윤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시 다물어졌고, 그녀의 두 손은 무릎 위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 서로를 움켜쥐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오래전 잊었던 기대와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드는 사람의 얼굴 같았다. "함께…… 참석하라고?" 강서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자 집사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예, 부인. 후작님께서 직접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은의 머릿속은 이미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원작 게임 속에서 이 연회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는지, 그리고 그 자리에서 강서윤이 목격하게 되는 여인이 누구인지를 떠올리려 애썼지만, 기억은 안개처럼 흐릿하게 흩어져 좀처럼 명확한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분명 그 연회였어…… 그 연회에서 모든 게 무너지기 시작했으니까.' 하은은 바닥에 떨어진 수첩을 조용히 주워 들며, 표지에 남은 손끝의 온기를 느꼈는데, 그 온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미 그녀의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하고 있었다. '벌써 시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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