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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촛불 하나가 놓인 서재의 작은 탁자 위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강서윤은 딸의 입에서 나온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한참을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고, 촛불이 타들어가는 소리만이 정적을 채우고 있었다. 치직. 심지가 타들어가며 작게 튀는 소리에 강서윤은 흠칫 어깨를 떨었으나, 정작 그 소리보다 더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방금 아홉 살짜리 딸이 내뱉은 말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니, 하은아. 다 죽는다니……"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는데, 그것은 단순히 놀라움 때문이 아니라, 딸의 눈빛이 그 나이대의 아이답지 않게 지나치게 또렷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하은은 급히 말을 돌렸는데, 아직 아홉 살짜리 딸에게서 나올 법한 말은 아니었으나 강서윤은 딸이 어릴 때부터 유난히 조숙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 이상한 예언을 그냥 흘려듣고 말았다. 그러나 하은의 속마음은 그렇게 가볍지 않았다. '믹스 상태에서 태그 스킵하면 안 되는데.' 전생의 그녀는 오토매틱 연애 시뮬레이션, 정확히는 방치형 연애 게임 〈보석의 서약~그대를 위한 러브스토리~〉의 열혈 플레이어였고, 그 게임 속 서브 히로인 중 하나였던 강서윤의 엔딩 시나리오를 수십 번도 넘게 돌려본 사람이었다는 것을, 지금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었다. 게임 속 세계에서 이 저택은 정확히 초반 시나리오의 배경이었고, 강서윤이라는 캐릭터는 원래 강씨 공작가의 외동딸로서 자유롭게 연애할 수 있었던 몸이었으나, 공작가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당시 세력이 필요했던 선우 후작가의 후계자 선우진혁에게 시집을 가게 되는 조연이었다. 그리고 그 조연은, 게임 시스템 상으로는 그저 '메인 남주의 배경 인맥'을 채워주는 카드 한 장에 불과했다는 것을 하은은 잘 알고 있었다. '현질 안 해도 알아서 굴러가는 게임이라, 방치해도 다들 그럭저럭 행복해지는데……' 그런데 문제는, 강서윤이 남편에게 첫눈에 반한 이후로 단 한 번도 그 마음을 접지 못했다는 것이었고, 남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를 정치적 파트너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결혼 후에도 진혁은 밖으로만 나돌며 아내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고, 강서윤은 그럴수록 더 그에게 매달렸으며, 그 매달림은 시간이 갈수록 집착으로, 다시 집착은 자기파괴적인 형태로 변해갔다. 하은은 그 모든 과정을 게임 텍스트를 통해 이미 읽었던 사람이었다. 게임 속 텍스트 창에는 이런 문장이 떠 있었더랬다. '강서윤은 매일 밤 남편의 방문 앞에서 촛불을 들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선택지는 늘 두 개뿐이었다. '무시한다' 혹은 '더 무시한다.' 어느 쪽을 눌러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하은은 씁쓸하게 떠올렸다. '배드 엔딩 3번, 강서윤 루트.' 게임 속에서 강서윤은 결국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시점에서 완전히 무너졌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촛불을 들고 저택 곳곳에 불을 놓는 것으로 자신의 챕터를 끝냈는데, 그 화재로 죽는 인물 중에는 그녀의 어린 딸 — 지금의 자신 — 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하은은 잊을 수 없었다. 타닥, 타닥. 그때의 텍스트 로그에서도 이런 소리 효과가 있었다는 것을, 하은은 지금 눈앞의 촛불 심지가 타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한번 곱씹었다. 화면 가득 붉게 번지던 이펙트와, 그 아래 조용히 떠오르던 마지막 대사창의 문구까지도. 다시 태어난 순간부터 하은은 매일 밤 그 화재 장면을 떠올리며 살아왔고, 잠에서 깰 때마다 등에 식은땀이 흥건히 배어 있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 일상이 되어 있었으며, 그렇기에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확신이 그녀를 이곳까지 밀어붙인 것이었다. '벌써 세 살 때부터 눈치는 챘었지만…… 이제야 겨우 말이 통할 나이가 됐으니까.' 아홉 살이라는 나이는, 어머니에게 진지하게 조언을 건네기엔 턱없이 어리고, 그렇다고 아무 말도 못 할 나이는 아니었다는 것이 하은의 계산이었다. "어머니." 하은이 다시 입을 열자 강서윤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딸을 바라보았다. 촛불 빛이 어른거리는 강서윤의 얼굴은, 한때 사교계에서 손꼽히던 미인이라는 평을 들었을 만큼 단정한 이목구비를 갖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 위로 옅게 드리운 그늘이 더 눈에 띄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좋아하시죠?" "……그야, 남편이니까." 대답이 궁색했고, 하은은 그 궁색함 속에 숨은 진심을 정확히 짚어냈다. '저럴 줄 알았어. 정작 본인은 인정 안 하려고 하지만.' "아니요, 그냥 좋아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 좋아하는 방식이, 아버지를 향한 게 아니라 어머니 자신을 향한 벌처럼 되어버렸어요." 강서윤의 눈이 흔들렸고, 하은은 그 흔들림을 놓치지 않은 채 계속했다. "매일 밤 아버지 방문 앞에서 기다리시잖아요. 그러다가 아버지가 안 오시면 혼자 우시고요." "그, 그건 어떻게……" 강서윤의 목소리가 갈라졌는데, 딸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은은 그 수치심을 자극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곧바로 다음 말을 이어 붙였다.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저는 어머니를 이상하게 보는 게 아니라…… 그냥, 그 방법이 잘못됐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방법이…… 잘못됐다고?" "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자신을 갉아먹으면서 좋아하는 건, 결국 좋아하는 사람도 힘들게 하고 자기 자신도 무너뜨리는 방법이니까요." 하은은 그렇게 말하며 속으로 다시 한번 되새겼다. '이대로 두면 정말 다 죽어. 나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방화 엔딩까지 가는 경로는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으며, 지금처럼 매달리고 무시당하고, 다시 매달리는 패턴이 몇 년간 누적되면서 서서히 완성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하은은 게임 텍스트의 세세한 회상 장면들을 통해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제가 새로운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아버지를 좋아하는 새로운 방법요." "새로운…… 방법?" 강서윤의 목소리에는 의아함과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스며든 옅은 기대감이 섞여 있었는데, 그것은 지금껏 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건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네. '추덕질'이라는 거예요." 낯선 단어에 강서윤은 눈만 깜빡였고, 하은은 속으로 작게 웅얼거렸다. '설명이 어렵겠지만, 반드시 이해시켜야 해.' 촛불이 다시 한번 작게 튀어 올랐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하은은 마른침을 삼키며 어머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의 대화가, 앞으로 자신과 부모의 목숨을 가르는 첫 갈림길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뻐근하게 밀려 올라오고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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