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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깊은 밤, 선우 후작가의 저택은 온통 어둠에 잠겨 있었다. 넓은 정원을 지나 저택 안으로 들어서면 복도마다 걸린 등불도 이미 꺼진 지 오래였고, 하인들의 방도 조용했으며, 오직 후작의 서재만이 창틈으로 희미한 불빛을 흘려보내고 있었는데, 그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향으로 조그마한 발이 살금살금 움직이고 있었다. 바닥의 냉기가 버선을 뚫고 발바닥까지 스며들었으나, 그 아이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홉 살 선우하은은 원래라면 벌써 세 시간 전에 잠들어 있어야 할 시각이었으나, 요즘 들어 밤마다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고, 그 이유를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또 저러고 계시겠지.' 그녀가 이 세계를 다르게 보게 된 것은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었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저택과 가족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모든 사건들이 전생의 자신이 읽었던 한 편의 소설 속 장면들과 정확히 겹쳐진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시나리오라는 것은, 정해진 순서대로 흘러가는 이야기의 뼈대를 말하는 것이었고, 그 뼈대 안에서는 아무리 작은 인물이라도 결국 정해진 결말을 향해 걸어가게 되어 있었으며, 문제는 그 결말이 지금 이 순간 서재에 있는 여인의 손끝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었다. 서재 문틈으로 조심스레 눈을 대자, 예상대로 어머니 강서윤이 그 안에 있었다. 촛불 하나만 켜둔 채 남편의 책상 앞에 무릎을 꿇듯 앉아, 그가 두고 간 낡은 손수건 한 장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그 손수건은 색이 바랠 정도로 오래된 것이라 아마도 결혼 첫해에 받은 것이 아닐까 하은은 짐작했다. 가장자리에 정교하게 놓인 수가 눈에 익었던 것도 그 짐작에 힘을 실었는데, 어머니는 시집오기 전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손꼽히는 자수 솜씨를 지녔다고 유모에게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촛불에 비친 강서윤의 얼굴은 스물아홉이라는 나이가 무색하도록 창백했고, 반쯤 감긴 눈꼬리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으며,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하은은 가슴 한쪽이 뻐근하게 조여드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또…… 시작이야.' 이런 밤이 처음이 아니었다. 하은이 처음 이 광경을 목격한 것은 두 달 전 어느 비 오는 밤이었는데, 그날도 지금처럼 촛불 하나가 방을 지키고 있었고, 그날도 강서윤은 지금과 같은 자세로 손수건을 쥐고 울고 있었다. 그때는 그저 어머니가 아버지를 많이 그리워하시는구나, 하고 순진하게 넘겼을 뿐이었지만, 이제는 그 눈물의 무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강서윤은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낮게 흐느끼고 있었는데, 그 울음소리가 너무 작아서 마치 스스로도 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웠고, 그런 조심스러움이야말로 하은에게는 가장 불안한 신호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전생에서, 이 세계가 단순한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완결된 시나리오라는 것을, 그리고 그 시나리오의 끝에 이 어머니가 자신의 두 손으로 저택 전체에 불을 지르는 장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말을 처음 떠올렸을 때, 하은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렸던 기억이 있었다. 소설 속에서 강서윤이라는 인물은 아름답고 순종적이었으나 동시에 지독하게 외로운 여인으로 묘사되었고, 남편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서서히 미쳐가다가, 결국 어느 겨울밤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과 함께 스스로를 불태우는 결말을 맞았다. 그 장면을 글로만 읽었을 때는 그저 하나의 비극적인 서사로만 여겼을 뿐이었으나, 지금 이렇게 그 여인의 무릎에 실제로 앉아 그녀의 온기를 느끼고 있자니, 그것은 더 이상 종잇장 위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막아야 해.' '반드시…… 막아야 해.' 달칵. 문을 여는 소리에 강서윤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고,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다급히 소매로 훔치며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은아, 안 자고 왜 여기까지 왔어……" 목소리는 다정했으나 그 끝이 미세하게 갈라져 있었고, 하은은 그 갈라진 틈을 못 본 척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또각또각, 작은 발걸음으로 다가가 어머니의 무릎 위에 냉큼 앉은 그녀는, 아직 아이의 몸에 담긴 어른의 눈으로 강서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어머니의 눈 밑은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한 사람처럼 그늘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고, 그 모습이 하은의 마음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어머니, 그 손수건 이리 주세요." 말투는 나이에 맞지 않게 담담했고, 강서윤은 얼떨결에 손수건을 내주었는데, 하은은 그것을 받아 손끝으로 낡은 감촉을 가만히 느껴본 뒤 반듯하게 접어 자신의 작은 주머니 안에 넣어버렸다. "이건 이제부터 제가 보관할게요. 어머니가 밤마다 울면서 만지시면, 언젠가 이게 다 젖어서 얼룩이 남을 테니까요." "……하은아?" 강서윤은 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곧바로 이해하지 못한 채 눈을 크게 떴고, 촛불빛 아래에서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당혹감과 함께 옅은 두려움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하은은 그 놀란 눈을 마주 보며 나지막이, 그러나 아주 분명하게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매일 밤 여기 앉아서 아버지가 두고 가신 물건들만 붙잡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아버지는요? 아버지도 어머니처럼 밤마다 울면서 어머니 물건을 붙잡고 계세요?" 그 물음에 강서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파르르 떨었고, 하은은 그 침묵이야말로 자신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를 좋아하는 방법이 잘못됐어요, 어머니. 이대로 계속하시면……" 말을 잠시 멈춘 그녀는 어머니의 손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었고, 그 온기가 손끝에서부터 퍼지는 것을 느끼며 마음을 다잡았다. '말해야 해. 지금이 아니면 늦어.' '그날이 오기 전에, 반드시.' 그녀는 결심한 얼굴로, 아이답지 않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 계속하시면, 우리 다 죽어요." 그 한마디에 강서윤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고, 촛불이 불안하게 흔들리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강서윤은 딸의 눈을 들여다보며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그 입술은 몇 번이나 벌어졌다가 다시 닫혔을 뿐 끝내 아무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고, 그런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한 하은의 가슴속에서는 지금 이 순간부터 무엇을, 어디서부터 바꾸어야 할지에 대한 초조함이 무섭도록 빠르게 차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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