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대접견실로 향하는 복도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었다.
붉은 카펫이 깔린 바닥 위로 하늘의 발소리가 또각또각 울렸다. 나는 하늘의 품에 안긴 채,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를 하나둘 세고 있었다. 하나, 둘, 셋…… 어느새 열 개가 넘어가자 세는 것도 지겨워졌다.
"아가씨, 표정 푸이소."
하늘이 작게 속삭였다.
"제 얼굴이 뭐가 어때서요."
"딱 굳어 있어예. 애기가 그러면 이상하지예."
애기라는 말에 속으로 실소가 나왔다. 애기라니. 내 정신연령이 몇인데. 하지만 겉모습은 분명 네 살, 이 세계에서는 아직 걸음도 위태로운 나이였다. 몸과 정신의 갭이 이렇게 클 줄 누가 알았겠나. 게임 속 설정으로만 존재하던 세계에 떨어진 것도 억울한데, 사족보행도 겨우 뗀 몸뚱이로 정략결혼 신부 후보 노릇을 해야 한다니. 인생 참 하드모드로 시작하는구나 싶었다.
접견실 문이 서서히 열렸다.
천장이 어찌나 높은지 목이 아플 정도였고, 벽에는 은빛 문양이 새겨진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그 위로 스테인드글라스 창이 오후 햇살을 받아 알록달록한 빛무리를 바닥에 흩어놓고 있었다. 눈이 즐겁긴 한데,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긴장 안 하셔도 됩니더."
하늘이 낮게 속삭였다. 나는 하늘의 품에 안긴 채, 접견실 중앙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관찰자로 남기.
그 다짐을 몇 번이고 되새기며, 최대한 표정을 지웠다. 어린아이답게, 아무 생각 없는 얼굴로. 속으로는 계속 되새겼다. 나는 그냥 지나가는 손님이다. 스토리에 개입할 필요 없다. 조용히 있다가 조용히 나가면 된다. 원작 알고 있는 티 내지 말고, 이 궁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벽지처럼 지내면 그만이다.
접견실 상단, 계단 위 옥좌 옆에 그가 서 있었다.
은색 머리카락이 조명을 받아 반짝였고, 물빛 눈동자는 얼음처럼 투명했다. 키는 훌쩍 크고, 자세는 흐트러짐 없이 곧았다. 서 있는 모습만 봐도 숨 쉬는 조각상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강시우.
원작 게임에서도 몇 번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마주하니 그림보다 훨씬 압도적이었다. 스틸컷으로 볼 때는 그냥 예쁘게 그렸구나 싶었는데, 실물은 그 이상이었다. 얼음 조각 미남이라는 수식어가 왜 붙었는지 단번에 이해가 갔다.
하늘이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발끝이 카펫에 닿는 감촉이 낯설었다. 나는 배운 대로, 최대한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청하국의 아리, 인사드립니다."
작고 새된 목소리가 접견실에 퍼졌다. 스스로 듣기에도 우스꽝스러운 소리였다. 마이크 없이도 웅웅 울리는 이 공간의 구조 덕분에, 내 목소리가 더 어리고 우습게 들렸다.
정적이 흘렀다.
너무 길게 이어진 정적에, 나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강시우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 하나 없던 그 얼굴에, 아주 미세한 균열이 스쳤다.
뭐지.
그 균열은 아마 당황이었을 것이다. 예상보다 훨씬 어린, 아니 예상 자체를 뛰어넘은 신부 후보를 마주한 당황. 하긴, 나라도 저 자리에서 저런 걸 봤으면 당황했을 것 같다. 정략결혼 상대가 겨우 걸음마 뗀 애라니. 나였으면 뒤로 나자빠졌을지도 모른다.
"……네 살이라고 들었다."
낮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목소리마저 얼음 같았다.
"네, 그렇습니다."
"청하국은, 어린아이를 정략의 도구로 쓰는 것에 거리낌이 없나 보군."
뼈 있는 말이었다. 나는 순간 발끈했지만,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속으로는 억울했다. 나도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든다고. 근데 내가 결정한 것도 아닌데 왜 저 얼음 같은 눈초리가 이쪽으로 오는지.
"……죄송합니다."
대신 짧게 사과했다. 강시우의 물빛 눈동자가 조금 더 가늘어졌다.
"사과할 필요 없다. 네가 결정한 일이 아니니."
그 말에 나는 조금 놀랐다. 냉정하다는 소문과는 다르게, 최소한의 배려는 있는 사람이었다. 게임 속에서는 그저 배경 캐릭터, 혹은 냉혈한 황태자로만 묘사되던 인물이었는데. 실제로 마주하니 결이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는 별궁에서 지내게 될 것이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시종에게 말하도록."
"감사합니다."
대화는 그걸로 끝나야 했다. 형식적인 첫 대면, 형식적인 인사. 그대로 물러나면 됐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인사만 하고 끝, 그리고 몇 년간 별궁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성인 되면 대충 파혼각 잡고 도망가면 되는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강시우가 계단을 내려와, 내 앞에 무릎을 굽혔다.
갑작스러운 거리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의 물빛 눈동자가 아주 가까이서 나를 응시했다. 마치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시선이었다. 코앞에서 보니 눈동자 안에 옅은 은빛 반점 같은 것도 보였다. 이런 상황에 딴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정신머리가 나갔나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긴장하면 이상한 데로 관심이 새는 버릇이 있었다.
"……이상하군."
"네?"
"눈빛이."
그가 짧게 중얼거렸다.
"네 살 아이의 것이 아니야."
등골이 서늘해졌다.
관찰자로 남으려 했는데, 이미 첫 대면에서 정체를 들킬 위기였다. 시작부터 이렇게 삐걱거리면 앞으로 몇 년을 어떻게 버티나.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 저는……"
말을 더듬는 사이, 강시우가 손을 뻗어 내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차가운 손끝이 피부에 닿는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손끝이 정말 얼음장 같았다. 이 사람은 혈액순환이 안 되는 건가, 아니면 원래 체온이 낮은 체질인가, 이런 쓸데없는 생각까지 스쳤다.
"뭘 숨기고 있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신에 가까운 어조였다.
하늘이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황태자 전하, 아가씨는 아직 어리셔서 긴장하신 것뿐입니더."
강시우의 시선이 하늘에게로 옮겨갔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기류가 흘렀다. 하늘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단호함은 분명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를 감싸주는 하늘이 고마웠다.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조금 더 단단해졌다.
"……그런가."
결국 강시우는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물빛 눈동자는, 물러나는 순간까지도 나를 놓지 않고 있었다. 그 시선이 등에 꽂히는 느낌은, 무릎이 접힌 각도까지 다 계산해서 관찰하는 것 같은 압박감이었다.
"별궁으로 안내해라."
짧은 명령을 남기고 그는 접견실을 떠났다.
하늘이 다시 나를 안아 올렸다. 그제야 나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꺼."
"……괜찮아요."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하늘은 별말 없이 내 등을 토닥였다.
별궁으로 가는 길은 접견실보다 훨씬 소박했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동안,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시원했다. 별궁은 본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하얀 벽돌과 푸른 지붕이 조화로운 작은 건물이었다. 겉보기엔 아늑해 보였지만, 그 안에서 몇 년을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 무겁게 다가왔다.
방 안은 단정했다. 침대 하나, 작은 탁자, 창가에 놓인 화병. 화려하진 않지만 필요한 건 다 있는 구조였다. 나는 침대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 그 사람 좀 무서워요."
"그렇지예. 원래 그런 분이라 캐서……"
하늘이 말끝을 흐렸다. 뭔가 더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오늘 하루가 무사히 지나간 것에 감사할 뿐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하늘은 옆방으로 물러났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낮에 있었던 일이 자꾸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그 차가운 손끝, 확신에 가까운 목소리, 놓지 않던 시선. 관찰자로 남으려던 첫 시도는, 완벽하게 실패했다.
그리고 그날 밤, 별궁의 창문 너머로 낯선 그림자가 지나가는 걸 본 것 같았다.
분명, 은빛 머리카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