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보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정확히는, 보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순식간에 사람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 사이 나는 놀라울 정도로 하늘에게 의존하게 됐다. 밥을 먹는 것도, 옷을 갈아입는 것도, 심지어 걷다가 넘어지는 것조차 하늘의 손을 필요로 했다.
처음엔 자존심이 상했다. 나도 성인인데, 밥 한 술 뜨는 것까지 남의 손을 빌려야 하나 싶어서. 그런데 이 몸뚱이가 문제였다. 뼈가 유리로 된 것마냥, 조금만 무리하면 어딘가 결리고 아팠다. 개복치도 이 정도면 서운해할 몸 상태였다.
"자, 아가씨. 여 손 잡으이소."
마차에 오르는 계단이 나에게는 등산로였다. 세 칸짜리 나무 계단이 뭐가 그렇게 높은지, 다리를 들어 올릴 때마다 종아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하늘이 아무렇지 않게 나를 들어 올려 안에 앉혀줬다. 새끼 고양이 옮기듯 가볍게.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마차 안에는 나와 하늘, 그리고 최소한의 짐만 실려 있었다. 이불 몇 채, 옷가지 몇 벌,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상자 하나. 아버지는 국경까지만 배웅하고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 이상은, 이 결혼이 정치적 거래일 뿐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 같아서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배웅이 길어지면 정 붙일 시간도 길어지는 법이니까.
마차가 덜컹거리며 출발했다. 창밖으로 청하국의 낮은 지붕들이 하나씩 멀어지는 걸 보면서, 나는 이상하게 뭉근한 감정을 느꼈다. 시원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한, 그런 애매한 기분.
"하늘 씨,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뭡니꺼."
"이 세계에 언제 왔어요?"
하늘이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 말이 없었다. 마차 바퀴 소리만 덜그럭덜그럭 채워 넣는 침묵이었다.
"오래됐습니더.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저도 이제 잘 모릅니더."
"그래도 원래 세계 기억은 나요?"
"어렴풋이는요. 뭐 하다가 왔는지, 그런 거는 안 알려드리고 싶습니더."
단호한 거절이었다. 그 순간 하늘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는 걸 봤다. 뭔가 사연이 있는 눈빛. 더 캐물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화제를 돌렸다.
"그럼 강도제국은 어떤 곳이에요?"
"크고, 차갑고, 위험한 곳입니더."
"구체적으로요."
"황제 폐하는 여러 소국을 힘으로 병합한 분입니더. 십오 년 전에는 숲의 나라 청림국도 병합됐다 캅니더."
청림국.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었다. 게임 설정집 어딘가에서, 조연 궁녀의 배경으로 나왔던 나라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게임 설정을 뒤적였다. 청림국 출신 궁녀라니, 혹시 여기서 만나게 될까.
"그리고 황태자는요?"
하늘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마치 그 이름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경계심이 발동하는 것처럼.
"강시우 황태자님요. 은색 머리에 물빛 눈을 가진 분입니더. 검술도 얼음 마법도 능하고, 이 나라에서 젤로 강한 사람 중 하나입니더."
"성격은요?"
"냉정합니더. 지금까지 혼약자 후보들 다 냉대해서 쫓아냈다 카는 말도 있고."
"저도 쫓겨나면 좋겠네요."
진심 반, 농담 반으로 던진 말인데 하늘이 정색했다. 표정이 순식간에 굳는 걸 보고 나는 조금 놀랐다.
"안 됩니더. 그리 되면 청하국이 위험합니더."
맞는 말이었다. 이 결혼이 나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잊고 살았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괜히 손가락으로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마차가 며칠을 달렸는지 모르겠다. 하루는 비가 왔고, 하루는 눈이 왔고, 또 어느 날은 해가 쨍쨍했다. 창밖 풍경이 초원에서 산길로, 산길에서 다시 거대한 성벽으로 바뀔 때쯤, 나는 잠에서 깼다. 목이 뻐근했다. 마차 안에서 자는 잠은 아무리 자도 개운하지 않았다.
"다 왔습니더."
하늘이 조용히 말했다. 목소리에 미묘한 긴장이 섞여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성벽은 청하국 왕궁 전체 규모의 몇 배는 될 것 같았다. 끝이 안 보이는 성벽이 좌우로 쭉 뻗어 있었고, 그 위로는 은빛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돈 지랄 보소.
속으로 조용히 감탄했다. 게임 CG로만 보던 규모를 실제로 보니 스케일이 다르다. 성벽 위로는 은빛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고, 정문에는 갑주를 입은 병사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창끝이 햇빛에 반짝일 때마다 눈이 시렸다.
"저기, 하늘 씨."
"네."
"저 이제부터 어떻게 행동해야 돼요?"
심장이 살짝 두근거렸다. 이제 진짜 시작이구나, 하는 실감이 뒤늦게 몰려왔다.
"그냥 조용히 계시믄 됩니더. 제가 다 알려드릴 낍니더."
조용히.
그 말이 지금 내 처지에 딱 맞는 단어였다. 방관자로 살기로 결심했으니,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이 게임의 흑막이든 뭐든, 나는 그냥 구석에서 숨만 쉬다가 조용히 퇴장하고 싶었다.
마차가 멈추자 하늘이 먼저 내려서 나를 안아 내렸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낯선 냄새가 코를 찔렀다. 눈 냄새. 겨울이 아닌데도 어딘가 서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청하국과는 확실히 다른 공기였다. 습기가 없고 건조했다.
"저쪼록 오시이소."
궁녀 하나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빨간 머리와 주근깨가 눈에 띄는,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머리를 야무지게 틀어 올린 모양새가 딱 봐도 손이 빠른 사람 같았다.
"박다은이라 합니다. 오늘부터 아가씨 시중을 맡게 되었습니다."
박다은은 나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어머, 정말 귀여우시네요."
"……감사해요."
칭찬인데 왜 이렇게 서글프지. 인형 취급받는 것 같은 이 기분, 익숙해질 때가 됐는데도 매번 새롭게 서글프다.
박다은이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걸음걸이가 다부졌다. 나는 하늘의 품에 안겨서, 이 거대한 성 안으로 실려 들어갔다.
돌기둥과 조각상,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회랑을 지나며 나는 눈으로만 사방을 훑었다. 조각상마다 표정이 죽어 있는 게, 이 궁 전체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화려하지만 차가운, 그런 느낌.
지나가는 궁인들이 나를 볼 때마다 표정이 묘했다. 호기심과 동정이 반씩 섞인 눈빛. 아마 다들 알고 있는 거겠지, 이 결혼이 어떤 의미인지. 냉대받고 쫓겨난 혼약자 후보들의 뒷이야기가 이미 이 궁 안에 소문으로 퍼져 있을 테니까.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관찰자로.
그런데 그 다짐이 깨질 순간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회랑 끝, 커다란 문 앞에서 하늘의 걸음이 갑자기 멈춰 섰다. 품에 안긴 채로 나는 하늘의 표정을 올려다봤다. 방금 전까지 무심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문 너머에서,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온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