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네 살배기 황태자비

3화

방관자. 그 단어를 마음속에 새기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이 세계에 들어온 이후로 나는 늘 뭔가를 바꾸려고 애썼다. 죽음의 엔딩에서 벗어나려고, 눈에 띄지 않으려고, 관계를 정리하려고. 마치 게임 스테이지 클리어라도 하듯 조건 하나하나를 지우려 들었다. 그런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었나. 결국 이렇게 몸까지 통째로 바뀌어서 낯선 나라에 팔려가는 신세가 됐는데. 패치 노트에도 없는 강제 업데이트를 당한 기분이었다. 정신은 열여덟 살인데 몸은 네 살. 캐릭터 롤백을 당한 것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하드모드인지. 그러니 이제부터는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흐르는 대로, 놓아두는 대로. 어차피 내가 뭘 발버둥 쳐봐도 설매라는 존재가 이미 판을 다 깔아놓은 것 같았으니까. 나는 그냥 그 판 위에 놓인 말이었다. 체스판의 폰. 그것도 제일 약한 폰. 다짐을 굳힌 그날 오후, 방문이 벌컥 열렸다. 탁! 문짝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네 살짜리 몸은 놀라는 반응 속도까지 빨라서,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었다. "인사드리것습니다." 낯선 억양의 목소리가 들렸다. 표준어인데, 어딘가 사투리가 섞여서 묘하게 어색했다. 억양의 굴곡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고개를 돌리니 검은 긴 머리를 늘어뜨린 사람이 서 있었다. 눈매는 가느다랗고, 표정은 무심했다. 나이는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서른쯤 되어 보였다. 허리에는 검이 매여 있었는데, 손잡이가 낡아서 실전에서 굴려온 물건이라는 게 한눈에 보였다. "저는 하늘이라 캅니다. 이제부터 아가씨 호위를 맡을 낍니다." "……네?" 방금 저 말투,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머릿속에서 뭔가 딸깍, 하고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사투리. 그것도 아주 구체적인, 어느 지방 특유의 억양. "뭐라 부르면 되까요. 아가씨, 라 하면 되나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사투리 억양이 섞인 저 말투는, 한국의 어느 지방 말투와 정확히 일치했다. "당신, 혹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심장이 괜히 빠르게 뛰었다. 설마, 설마 하는 마음과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한국 사람이에요?" 하늘의 가느다란 눈이 순간 커졌다. 그 반응만으로도 답은 나온 셈이었다. "……어예 아셨습니꺼." 서로 마주 보며 정적이 흘렀다. 나는 열여덟 살 정신을 가진 네 살 아이였고, 하늘은 서른쯤의 이세계 전이자였다. 둘 다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순간, 이상한 동질감이 스쳤다. 마치 해외여행 갔다가 낯선 나라 골목에서 우연히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난 기분이었다. 반가움과 안도감이 뒤섞인. "저도 한국 사람이었어요. 정확히는, 지금은 이 몸에 들어와 있는 거지만." 말을 뱉으면서도 스스로 좀 웃겼다. 자기소개가 이렇게 복잡할 일인가. '안녕하세요, 저는 원래 다른 몸의 주인이었는데 지금은 남의 몸에 세입자로 들어와 있습니다.' 명함이 있다면 그렇게 써야 할 판이었다. "아, 그러시구나예." 하늘은 그 말을 듣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히 겪어본 반응이라는 뜻이었다. "저는 스승님 밑에서 지낸 지 좀 됐습니더. 이런 일 흔합니다." "스승님이요?" "시간의 마녀, 설매님이요." 또 그 이름. 가슴 한쪽이 쿵, 내려앉았다. 이름 하나 나올 때마다 내 인생의 방향이 자꾸 그쪽으로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마치 GPS가 고장 나서 계속 같은 목적지로만 나를 몰아넣는 것처럼. "당신이 설매의 제자예요?" "네. 아가씨를 이 나이로 만든 것도 스승님 뜻이었고, 저를 호위로 보낸 것도 스승님 뜻입니더." 뭔가 거대한 그림 속에 내가 놓인 느낌이었다. 설매가 무슨 목적으로 나를 이렇게 만들고, 왜 이 사람을 보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마치 소설 3권짜리 세계관을 1권 초반부터 스포당하는데 스포러가 결정적인 부분만 쏙 빼고 말해주는 느낌이었다. 답답해 죽겠는데 물어볼 데도 없었다. "그럼 앞으로 저를 계속 지켜주는 거예요?" "침소 시종도 겸합니더. 밥도 챙기고, 옷도 갈아입히고." "……저 애기 아니거든요." "신체는 애기 맞잖습니꺼." 반박할 말이 없었다. 정신은 열여덟인데 몸은 네 살이니, 밥을 떠먹여줘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숟가락 하나 제대로 못 드는 손가락으로 뭘 어떻게 하겠나. 서글프게도, 이 몸은 걷다가 넘어져서 코를 박아도 이상하지 않을 몸이었다. "그럼 목욕도……" "당연히 제가 씻겨드려야지예." "……" 이건 좀, 정신적으로 타격이 컸다. 열여덟 인생 다 살고 이제 와서 누군가에게 몸을 씻김당해야 하는 처지라니. 인생 난이도가 헬모드로 급전환된 기분이었다. 서글픔이 밀려오려는 찰나, 하늘이 무릎을 굽혀 내 눈높이에 맞추더니 씩 웃었다. 그 웃음이 의외로 다정해서, 방금까지 느꼈던 서글픔이 살짝 옅어졌다. "근데요, 아가씨. 걱정 마이소. 제가 검 좀 씁니더." "검이요?" "강도제국 가면 위험한 일 많을 낍니더. 그때마다 제가 다 썰어드릴 겁니더." 썰어드린다는 표현이 너무 태연해서, 나는 순간 웃음이 터졌다. 무섭게 들려야 정상인데, 하늘의 말투에서 나오는 그 표현은 이상하게 든든했다. 마치 동네 아저씨가 "걱정 마, 형이 다 처리해줄게" 하는 느낌과 비슷했다. "그렇게 무섭게 말하지 마세요." "무섭긴요. 든든한 거지예." "칼로 썰어드린다는 게 든든한 표현이에요?" "강도제국에서는 이 정도 표현이 순한 편입니더." 그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이 안 갔다. 표정이 워낙 일관되게 무심해서, 웃기려고 한 말인지 진짜로 위험한 곳이라 경고하는 건지 종잡을 수 없었다. 하늘은 자신이 원래 뭘 하다가 이 세계에 왔는지 말하지 않았다. 나 역시 내 사정을 다 털어놓지 않았다. 서로 어긋난 소통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어긋남 속에서 작은 신뢰가 자라나고 있었다. 상대의 배경을 몰라도, 지금 이 순간 나를 지켜주겠다는 말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적어도 이 사람은, 나를 이용하려는 계산 없이 나를 지켜준다고 말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근데 하늘 씨." "네." "제 정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줘요. 이 세계 사람들한테 우리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거." 하늘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 짧은 순간의 변화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눈매가 가늘어지다 못해 아예 닫히는 느낌이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됩니더." "왜요?" "제 정체는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려는데, 하늘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며 창밖을 바라봤다. 등을 돌린 그 자세가, 더 이상 이 얘기는 하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느껴졌다. "보름 뒤에 떠나신다고 들었습니더. 준비 서둘러야 할 낍니더." 대답을 피하는 게 분명했다. "저기, 하늘 씨. 아직 제 질문에 대답 안 하셨는데요." "짐 정리는 나중에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더. 옷은 몇 벌이나 챙기실 낍니꺼." 완벽하게 화제를 돌리는 기술이었다. 마치 능숙한 직장 상사가 곤란한 질문 받으면 회의 일정으로 말을 돌리는 것과 똑같았다. 나는 그 순간, 이 사람에게도 뭔가 숨겨진 사정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말은, 뒤집어 보면 내가 아직 모르는 어떤 소문이나 사연이 이 세계 안에 이미 퍼져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뭔지, 왜 하늘이 저렇게까지 표정을 굳히는지, 궁금해서 입이 다 마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캐물을 틈도 없이, 하늘은 벌써 방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뒷모습만 보고도 더는 대답하지 않겠다는 게 느껴져서, 나는 하려던 질문을 삼켰다. 문이 닫히기 직전, 하늘이 살짝 고개를 돌렸다. "참, 아가씨." "네?" "강도제국 가시면……" 말을 하다 멈췄다. 몇 초간의 침묵. 그 침묵이 이상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아입니다.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더."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나는 홀로 방에 남았다. 방금 하늘이 무슨 말을 하려다 삼켰는지, 그 표정에 스쳐 간 그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강도제국이라는 곳으로 가는 여정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위험한 무언가를 품고 있다는 것. 방관자로 살겠다는 다짐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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