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봉인 풀고 2주 만에 파혼

5화

나는 선재와 함께 지내기 시작한 지 며칠쯤 됐을 무렵,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그의 방문을 두드렸는데, 딱히 볼일이 있어서는 아니었고 그저 하루를 마무리하며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자는 심산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나는 뜻밖의 존재들과 눈이 마주쳤다. 콩알만 한 크기의 작은 정령 세 마리가 그의 어깨와 머리 위에 각각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는데, '이게 뭐지, 선재 머리 위에 뭐가 올라가 있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 존재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게 느껴져서 나는 순간 멈춰 섰다. 하나는 콩처럼 동글동글한 갈색 몸통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팥처럼 짙은 자주색을, 마지막 하나는 밤처럼 매끈한 짙은 갈색을 띠고 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각기 다른 크기의 작은 날개 같은 것이 등에 붙어 있어서 파닥거릴 때마다 미세한 바람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 셋이 저마다 짹짹거리며 선재의 어깨 위에서 옥신각신하는 모습—갈색 녀석이 자주색 녀석의 자리를 밀어내려는 듯 몸으로 부딪치고, 자주색 녀석은 지지 않겠다는 듯 짹짹 소리를 높이는 그 광경을 보고 나는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다. 마신의 방에서 이런 만화 같은 소동이 벌어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 애들은 콩이, 팥이, 밤이야." 선재가 소개하는 이름들이 지나치게 소박해서, 나는 마신이라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이런 작명 센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 신기했다. 몇백 년, 몇천 년을 살아온 존재가 저 조그만 생물들에게 붙여준 이름이 하필이면 콩이, 팥이, 밤이라니. '재미있네, 마신도 이런 귀여운 이름을 짓는구나.' 나는 속으로 그 이름들을 되뇌어보며 웃음을 참았다. 봉인고 안에서 얼마나 심심했으면 사역귀 이름까지 저렇게 지었을까 하는 생각도 스쳤지만, 그 생각은 금방 다른 궁금증에 밀려났다. 사역귀라는 존재를 처음 본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콩이라는 녀석을 만져보려 했는데, 그 작은 몸이 내 손가락을 요리조리 피하며 장난치듯 도망 다니는 게 어쩐지 사람 같은 영악함을 지니고 있었다. 손끝이 스칠 듯 말 듯 하는 순간 콩이는 슬쩍 몸을 틀어 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고는, 선재의 목덜미 뒤로 숨어서 삑삑거리며 나를 놀리는 듯한 소리를 냈다. "얘 지금 저 놀리는 거예요?" 내가 물으니 선재는 대답 대신 어깨를 살짝 들썩이며 웃었는데, 그 웃음이 낮고 짧아서 오히려 더 다정하게 느껴졌다. 결국 나는 세 번째 시도에서야 겨우 콩이의 등을 손끝으로 살짝 쓸어볼 수 있었고, 생각보다 훨씬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에 놀라 손을 뗄 뻔했다. 그날부터 나는 선재의 방에 들를 때마다 이 세 마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됐는데, 특히 저녁마다 다 함께 모여 말놀이를 하는 게 어느새 하루의 소소한 즐거움이 됐다. 말놀이라는 게 별건 아니었고, 단어 하나를 던지면 다음 사람이 그 끝말을 이어받아 새로운 단어를 말하는 방식이었는데, 콩이와 팥이, 밤이가 저마다 삑삑거리는 소리로 단어를 만들어내는 걸 선재가 통역해주는 형태로 진행됐다. 처음엔 그 통역이라는 게 진짜인지 아니면 선재가 그냥 지어내는 건지 의심스러웠는데, 며칠 지나면서 콩이팥이밤이의 삑삑 소리에도 저마다 미묘한 억양의 차이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서는 그게 진짜 통역이라는 걸 믿게 됐다. "콩이가 '구름'이라고 했어." 선재가 그렇게 전해주면 나는 다음 단어를 고민하며 '름'으로 시작하는 말을 찾았는데, 결국 '름'으로 시작하는 단어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아 몇 번이나 머리를 싸맨 끝에 "름, 름... 아 모르겠다, 이거 반칙 아니에요?" 하고 항의했더니 선재는 태연하게 "규칙은 규칙이야"라고 대답하며 팔짱을 꼈다. 결국 내가 벌칙으로 노래 한 소절을 불러야 했는데, 그 와중에 팥이가 신이 나서 내 목소리에 맞춰 삑삑거리며 박자를 맞추는 통에 나는 노래를 부르다 말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유치한 놀이에 이렇게 열중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전생에 회식 자리 게임도 이렇게 열심히 안 했는데.' 부장님 앞에서 마지못해 박수 치던 그 시절이 떠올라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며칠이 반복되면서 나는 점점 선재라는 존재에 대한 경계심이 조금씩 옆으로 밀려나는 걸 느꼈는데,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예상외로 편안하고 유쾌했기 때문이었다. 처음 그를 마주했을 때만 해도 나는 그의 존재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는데, 지금은 저녁마다 그의 방문을 두드리는 게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어버린 걸 보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쉽게 옮겨가는지 새삼 신기할 지경이었다. '이게 스톡홀름 신드롬인가.'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놀렸지만, 정말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그와 콩이팥이밤이가 만들어내는 이 작은 소란이 좋았을 뿐이었다. 어느 날 저녁, 말놀이가 한창일 때 내가 무심코 '사람'이라는 단어를 던졌는데, 선재가 잠깐 멈칫하더니 대답 대신 낮게 웃었다. 그 웃음이 평소와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지고 있어서, 나는 순간 뭔가 잘못 말했나 싶어 어깨를 움찔거렸다. "나는 그 단어에 낄 자격이 없는데." 그 말이 가볍게 던진 농담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아서 나는 순간 말놀이의 흐름을 잊고 그를 바라보게 됐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묻자 그는 어깨를 살짝 으쓱하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 옆얼굴이 창밖에서 스며드는 흐릿한 달빛을 받아 마치 조각가가 정성스레 깎아낸 대리석상처럼 매끈하게 빛났는데, 그 아름다움과 대비되어 그가 뱉은 말의 서늘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난 인간이었던 적이 없어서." 그 대답이 너무 태연해서 오히려 더 서늘하게 다가왔는데, 나는 그동안 그와 나눈 유쾌한 시간들 속에서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또렷하게 상기하게 됐다. '역시 이 사람은 사람이 아니었구나.' 그 자명한 사실이 새삼스럽게 가슴 한쪽을 찌르는 게 이상했다. 콩이와 팥이, 밤이도 그 순간만큼은 조용해졌는데, 마치 그 화제가 저희들에게도 조심스러운 것인 양 눈치를 보는 듯한 몸짓이었다. 평소라면 서로 밀치락달치락하며 짹짹거릴 녀석들이 선재의 어깨와 머리 위에 얌전히 앉아 날개를 접고 있는 모습이, 오히려 그 침묵의 무게를 더 실감하게 만들었다. 나는 뭔가 더 묻고 싶었지만, 선재의 표정에서 더 이상 이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어 하지 않는 기색이 느껴져서 결국 다음 단어로 화제를 돌렸다. "그, 그럼 다음 단어는... '밤'이라고 할게요." 나는 어색하게 말놀이를 이어갔고 선재도 그 신호를 알아차렸다는 듯 다시 평소의 낮은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나는 그 웃음이 조금 전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걸, 억지로 끌어올린 웃음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물어봐야겠지만, 오늘은 아닌 것 같아.' 그날 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며 선재가 남긴 말을 곱씹었는데, 그가 인간이었던 적이 없다는 그 말이 단순한 존재의 차이를 넘어서, 그가 겪어온 시간의 길이와 무게를 짐작하게 만들었다. 인간이었던 적이 없다는 건, 그가 처음부터 지금의 그 모습으로, 그 존재로 태어났다는 뜻일까. 아니면 인간이라는 범주 자체에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오래전부터 다른 무언가였다는 뜻일까. 봉인고 안에 얼마나 오래 갇혀 있었는지, 그전에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왜 하필 그날 이도윤이 그 문을 열었을 때 나에게 그런 짓을 했는지—이 모든 물음들이 아직 하나도 풀리지 않은 채로 내 안에 쌓여가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내도 괜찮은 걸까.' 나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몸을 뒤척였다. 낮에는 콩이팥이밤이와 함께 웃고, 선재와 말놀이를 하며 하루를 보내는 게 그저 즐겁기만 했는데, 이렇게 혼자 밤을 마주하고 있으니 낮 동안 미뤄두었던 질문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어 나를 압박해왔다. 창밖으로 별빛이 유난히 선명하게 빛나는 밤이었는데, 나는 그 별빛 아래 어딘가에서 선재도 나와 같은 창을 바라보고 있을지 궁금해졌고, 혹시 그도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던진 그 한마디를 곱씹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그가 그렇게 태연하게 흘린 그 한마디가 앞으로 내 삶을 얼마나 크게 뒤흔들어놓을지는, 그때의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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