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이도윤의 봉인고 습관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는 건 이미 궁 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엔 나도 이게 무슨 대단한 반항인가 싶어 진지하게 받아들였는데, 몇 번 겪어보니 그냥 이 남자 특유의 심심풀이 땡깡이라는 걸 알게 됐고, 그럼에도 왕실 어른들이 딱히 강하게 제지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태자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태자라는 이름값이 얼마나 편리한 방패인지, 나는 매번 그 뒤처리를 하면서 새삼 깨닫곤 했다. 대신 그 뒤처리는 늘 나 같은 사람의 몫으로 돌아왔고, 나는 그럴 때마다 속으로 되새김질했다. '권력이란 이런 식으로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거구나. 대단한 통찰이다, 나도 참.'
그날도 시종이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태자가 또 자취를 감췄다는 보고를 올렸는데, 그 얼굴에 이미 죄송하다는 말이 반쯤 걸려 있는 걸 보고 나는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는 게 더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별다른 지시도 없이 몸을 돌려 지하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이 정도면 내 발이 스스로 알아서 그쪽으로 향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익숙해진 동선이었다. 계단 손잡이의 차가운 감촉조차 이제는 낯설지 않았다.
궁의 다른 소식들도 이런 걸음걸음 사이로 들려왔는데, 요즘 들어 부쩍 아버지 이관형이 새 부인 쪽 딸인 지유를 데리고 궁에 자주 드나든다는 소문이 시녀들 사이에서 돌고 있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냥 흘려들었다. 두 번째 들었을 때도 별생각 없었다. 그런데 세 번째, 네 번째쯤 되니까 슬슬 이건 그냥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고, 나는 그 소문을 들을 때마다 별생각 없이 흘려보내려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왠지 모를 불편함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설마 별일 있겠어.' 나는 그렇게 애써 별일 아니라고 자신을 다독였지만, 그 다독임이 얼마나 얇은 얼음판 같은 건지는 나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별생각과 걱정을 번갈아 씹으며 계단을 내려가던 나는, 평소와 달리 이번에는 봉인고 앞에서 조금 다른 풍경을 마주하게 됐다. 평소라면 이도윤이 팔짱을 끼고 문에 등을 기댄 채 심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정해진 그림이었는데, 오늘은 그 그림이 완전히 어긋나 있었다. 이도윤은 오늘도 철문 앞에 서 있었는데, 그 손에 낯선 열쇠 하나가 들려 있는 게 눈에 들어온 순간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다. 열쇠는 낡고 거칠었으며,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 얼핏 봐도 평범한 창고 열쇠는 아니라는 걸 짐작하게 했다.
"전하, 그건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내 목소리가 평소보다 날카롭게 나갔는지, 그가 슬쩍 눈치를 보며 뒷걸음질을 쳤다. 저 남자가 눈치를 본다는 것 자체가 이미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신호였다.
"그냥, 서고에서 우연히."
우연히 서고에서 절대 열어선 안 되는 문의 열쇠를 발견했다는 말을, 나는 도저히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서고에 그런 열쇠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닐 리도 없고, 설령 굴러다닌다 해도 이 남자가 그걸 그냥 지나칠 리도 없었다. '우연히, 라는 말을 저렇게 태연하게 하는 걸 보면 이미 며칠 전부터 찾아다녔다는 뜻이겠지.' 나는 그의 표정에서 그 며칠간의 계획을 읽어내면서 속으로 욕을 삼켰다.
"우연히라는 말을 그렇게 뻔뻔하게 하실 수 있는 것도 재능이십니다."
"그런가. 몰랐군, 내가 그런 재능이 있는지."
이럴 때 보면 진짜 태자라는 신분이 아니었으면 벌써 몇 번은 목이 날아갔을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열쇠를 뺏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는 예상보다 빠르게 몸을 틀며 열쇠를 문 안으로 밀어 넣었고, 그 순간 나는 이미 늦었다는 걸 직감했다. '이 사람, 진짜로 열 생각이었구나.' 말릴 틈도 없이 손끝이 허공만 움켜쥐었다.
철문 안쪽에서 무거운 쇳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짐승이 몸을 일으키는 소리 같아서, 나는 반사적으로 이도윤의 팔을 잡아당기며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그는 오히려 흥미로운 눈빛으로 문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어찌나 태연한지, 나는 순간 이 남자가 위험이라는 개념을 모르고 태어난 게 아닐까 싶었다.
"전하, 위험합니다. 지금이라도 멈추셔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완전히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 안쪽에서 짙은 냉기가 밀려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 냉기는 그냥 차가운 게 아니라 뭔가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피부에 닿는 순간 소름이 좍 끼쳤고, 코끝이 얼얼할 정도로 공기의 밀도 자체가 달라졌다. '이건 그냥 창고 냄새가 아니야.' 창고 냄새라면 먼지와 곰팡이,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나야 하는데, 이 냉기에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대신 뭔가 짐승의 숨결 같은, 아주 오래 참아온 숨을 토해내는 듯한 느낌이 섞여 있었다.
이도윤도 그 냉기를 느꼈는지 표정이 굳어졌지만, 그는 여전히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한 걸음 더 안쪽으로 다가섰다. 나는 그 순간 이 남자의 목덜미를 붙잡아 강제로 끌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이 마음처럼 빠르게 움직여주질 않았다.
"전하, 제발 부탁입니다. 지금 물러나셔야 합니다."
"조금만 더, 보고 싶은데."
이 상황에서도 저런 태평한 대답이 나올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나는 이 순간 이 남자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과 동시에, 이 문 안에 있는 게 뭔지 궁금하다는 아주 사소하고 위험한 호기심이 마음 한구석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걸 느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궁금해하다니 나도 참 대단하다' 싶어 스스로가 어이없어졌다. 사람은 위기 앞에서 본능이 앞선다고 하던데, 나는 본능보다 호기심이 앞서는 특이한 부류인 모양이었다.
문 안쪽 어둠 속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진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이도윤의 옷깃을 붙잡아 뒤로 끌었지만, 그의 몸은 이미 문 안쪽 냉기에 반쯤 잠식된 듯 움직임이 둔해져 있었다. 손끝에 힘을 줘도 그는 마치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그 자리에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전하!"
내가 소리쳤을 때,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눈빛이 천천히 떠오르는 게 보였고, 그 순간 나는 이게 단순한 봉인고가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저 안에 갇혀 있던 게 뭔지는 몰라도, 적어도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눈빛은 노란빛도 아니고 붉은빛도 아닌, 이 세상에서 본 적 없는 색으로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냉기가 점점 더 짙어지며 복도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고, 나는 이도윤을 끌어당기다가 그대로 뒤로 넘어졌는데, 넘어지는 순간에도 시선은 문 안쪽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등이 바닥에 부딫히는 통증조차 그 순간에는 제대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내 정신은 온전히 저 어둠 속의 눈빛에 붙잡혀 있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고, 나는 그 형체가 완전히 드러나기 전에 이미 도망쳐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다리가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끝인가.' 머릿속으로는 온갖 도망칠 방법이 스쳐 지나갔지만, 몸은 그중 단 하나도 실행하지 못했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냉기가 이제는 얼음처럼 살갗을 찌르고 있었고, 나는 숨을 삼키며 그 형체가 완전히 문밖으로 걸어 나오는 순간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