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봉인 풀고 2주 만에 파혼

4화

그날 밤 나는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는데, 눈을 감으면 그 붉은 눈동자와 몸속을 헤집던 서늘한 감각이 자꾸만 되살아났기 때문이었고,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도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오한은 도무지 가시지 않았다. 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며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가 다시 반대로 돌아누웠다가를 반복했는데, 그럴수록 정신은 점점 더 또렷해져서 이러다 아예 밤을 새워버리는 게 아닐까 싶었다. '자야 해. 내일도 일해야 하잖아.' 태자궁 소속 관리라는 직함이 있는 이상 몸이 부서지든 정신이 나가든 아침에는 어김없이 출근 도장을 찍어야 하는 처지였고, 그 생각을 하니 오히려 더 잠이 오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결국 새벽이 다 되어서야 겨우 얕은 잠에 빠져들었는데, 그 잠마저도 깊지 못해서 자꾸 무언가에 쫓기는 꿈을 꾸다 놀라 깨곤 했다. '내가 뭘 본 거지.' 아침이 되어 눈을 떴을 때, 나는 이 모든 일이 그저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헛된 바람을 잠깐 품었다. 봉인고의 서늘한 공기와 그 안에서 마주친 존재감, 그리고 뭔가에 사로잡힌 듯 몸이 굳어버렸던 그 순간이 전부 지친 머리가 만들어낸 환영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하지만 창밖으로 들려오는 궁녀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 바람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태자궁 마당에 낯선 사람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경비들은 다 뭘 하고 있었대요?" "모르겠어요, 갑자기 나타났다니까요, 순식간에!"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낯선 사람이라는 단어에서 이미 어젯밤의 그 존재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옷을 갈아입는 손이 평소보다 서툴러서 옷고름을 두 번이나 다시 맸고, 머리는 대충 정리한 채로 방을 나섰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속으로는 아니길 바랐지만 발걸음은 이미 마당 쪽으로 빠르게 향하고 있었으니, 몸이 머리보다 먼저 답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서둘러 채비를 마치고 마당으로 나가보니, 정말로 그가 그곳에 서 있었다. 아침 햇살이 마당 전체에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는데, 그 빛 속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은 어젯밤 봉인고에서 봤던 압도적인 존재감과는 조금 다르게, 훨씬 사람에 가까운 온화한 분위기를 두르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는 여전했지만 표정만은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태평했고, 심지어 마당 한쪽에 핀 꽃을 들여다보고 있는 여유마저 부리고 있었다. '어젯밤엔 세상 다 끝낼 것 같은 얼굴이었으면서, 오늘은 왜 이렇게 평화롭지.' 나는 그 부조화가 어이가 없어서 잠깐 걸음을 멈추고 그를 지켜보았다. 마치 어젯밤 그 존재와 지금 이 존재가 서로 다른 두 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나를 발견하자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넸는데, 그 태도가 지나치게 자연스러워서 나는 잠깐 이 사람이 정말 어젯밤 그 존재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마치 이웃집 사람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편안한 손짓이었다. 주변에 몰려든 궁인들은 그런 그를 향해 함부로 다가서지도 못하고 멀찍이서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사람이 왕궁 심장부인 태자궁 마당에 아무렇지 않게 서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름은 선재라고 해." 그가 스스로 이름을 밝히는 순간, 주변에 있던 시종들과 궁인들이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는데, 이 낯선 남자가 갑자기 태자궁 마당에 나타나 자기 이름을 소개하는 상황을 다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누군가는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고, 누군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힐끔거렸다. 나는 그 어수선한 분위기를 뚫고 그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어젯밤 그… 봉인고에서 나온." 말을 다 끝내지도 못했는데 그가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 몸짓이 어찌나 태연한지, 마치 장난기 많은 아이가 비밀 놀이를 하자고 조르는 것 같은 인상마저 들었다. "그건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는데." 태연하게 비밀을 요구하는 그 태도에 나는 헛웃음이 나왔지만, 동시에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마신이라는 존재가 왕궁 한복판에 버젓이 서 있는데 그걸 비밀로 하자니, 이건 국가 안보 문제가 아닌가 싶었다. '지금 이 사람 눈에는 이게 그냥 재밌는 장난 정도로 보이나 본데, 나는 이거 잘못하면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일이거든.' 속으로 그렇게 항변해봤지만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이 존재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조차 감이 안 잡히는 판이었으니까. 그때 이도윤이 다가와 그를 흥미로운 눈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마치 신기한 물건을 감상하듯 느긋하게 시선을 옮기는 모습이었다. "이 사람이 그때 그… 재미있군, 인간형이 될 수 있다니." 이도윤의 반응은 오히려 신기해하는 쪽에 가까웠는데, 그 무책임한 호기심이 다시 발동하는 걸 보고 나는 이마를 짚고 싶었다. 이 사람은 어젯밤 봉인고에서 그 존재를 처음 마주했을 때도 겁을 먹기는커녕 눈을 빛내며 흥미로워하던 사람이었으니, 지금 이 반응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이 사람 큰일 낼 것 같아서 걱정했더니, 정작 본인은 신나 보이네.' 나는 이도윤과 선재를 번갈아 보며, 이 두 사람이 앞으로 무슨 사고를 함께 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피곤해졌다. 결국 궁 안에서는 이 낯선 존재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두고 짧은 논의가 이어졌는데, 이도윤은 그를 당분간 궁에 머물게 하며 지켜보자는 의견을 냈고, 몇몇 나이 든 관리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냈지만 이도윤의 결정을 뒤집을 만한 힘은 없었다. 나는 그 결정에 반대할 명분도 힘도 없어서 그저 떠밀리듯 받아들이게 됐다. '왜 항상 이런 결정은 나한테 아무 상의도 없이 이루어지는 거야.' 어젯밤 그 존재와 가장 가까이서 마주쳤던 사람이 나였는데, 정작 그를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하는 자리에는 내 의견이 낄 자리조차 없었다는 게 새삼 억울했지만, 이미 결정은 끝난 뒤였다. 그렇게 선재는 태자궁 별채에 임시로 머물게 되었고, 나는 그가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 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왜 나에게 그런 짓을 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로 그와 같은 지붕 아래서 지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별채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한숨을 삼켰는데, 이 알 수 없는 동거가 앞으로 얼마나 골치 아픈 나날을 안겨줄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날 오후 그의 방을 정리하러 갔을 때, 그는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며 뭔가 흥미로운 걸 발견한 사람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불을 개고 있던 손을 멈추고 나는 그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는데,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 볕이 그의 옆얼굴에 부드럽게 걸쳐 있어서, 이 사람이 정말 어젯밤 그 위협적인 존재였는지 다시 한번 의심이 들 정도였다. 붉은 눈동자가 빛을 받아 옅게 물드는 걸 보고 있자니, 어젯밤의 서늘함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낯섦이 밀려왔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요." 내가 묻자 그가 돌아보며 대답했다. "인간 세상, 오랜만이라서." 그 짧은 대답 속에 담긴 무게가 어쩐지 마음에 걸렸지만, 나는 그걸 캐물을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냥 방 정리를 계속했다. 이불을 펴고, 먼지가 앉은 서랍장을 닦고, 창틀에 쌓인 흙먼지를 손끝으로 훑어내리는 동안에도 그의 그 담담한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오랜만이라니, 대체 얼마나 오래 그 안에 갇혀 있었던 거야.' 봉인고라는 이름 자체가 뭔가를 가둬두기 위한 곳이라는 뜻일 텐데, 그 안에 얼마나 오래 있었기에 창밖 풍경 하나를 저렇게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걸까 싶어서, 나는 괜히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그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고, 나는 그런 그를 등지고 조용히 방 정리를 마쳤다. 방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돌아본 그의 뒷모습은 여전히 창밖을 향해 있었는데, 그 고요한 등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안심과 불안이 동시에 밀려오는 걸 느끼며 문을 닫았다. 그렇게 시작된 낯선 동거 생활은, 그날 밤의 서늘한 감각이 아직 가슴속에 남아 있는 채로, 조용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조용함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그때의 나는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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