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공작가의 대리 신부

5화

"누구세요." 내가 먼저 물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담담하게 나와서, 나조차 조금 놀랐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던 것과는 다르게, 입에서 나온 말은 침착했다. 다행이었다. 지금 이 방 안에서 흔들리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로 충분했으니까. 순간적으로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저 눈매, 저 태도. 문을 여는 손짓 하나에도 격식이랄 게 없었다. 노크도 없이, 마치 이 방이 원래 자기 것이었던 것처럼 들어왔다. 이 저택에서 저렇게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인일 리는 없고, 손님일 리도 없다. 그렇다면 남는 건 하나. "선우진이라고 합니다. 공작의 아들이지요." 예상이 맞았다. 아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결혼 준비를 하는 내내, 어머니가 몇 번이나 그 이름을 입에 올리며 걱정했으니까. "그 댁 아들이 그렇게 냉정하다더라." 하지만 정작 실물을 마주하니, 소문보다 더한 것 같았다. 공작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조금 의외였다. 생각보다 젊은 인상이었지만, 눈빛만큼은 공작 못지않게 서늘했다. 공작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조금 의외였다. 생각보다 젊은 인상이었지만, 눈빛만큼은 공작 못지않게 서늘했다. 그는 방 안을 훑어보았다. 시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나, 이지안,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잠긴 문 손잡이까지. 그 눈길이 문손잡이에서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아, 저건 놓치지 않는 눈이구나. 나는 그 순간 직감했다. "흥미로운 광경이군요."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전혀 부드럽지 않았다. 마치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발견한 사람처럼, 입가에는 웃음기가 있었지만 그 웃음이 나를 향한 호의는 결코 아니었다. 아버지가 서둘러 나섰다. 발이 반쯤 걸음이나 앞으로 나갔다가, 자기가 너무 급하게 움직였다는 걸 깨달았는지 다시 어색하게 멈춰 섰다. "아, 이건 그저 가족 간의 작은 다툼입니다.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언제나 저렇게 자신만만하던 아버지가, 이렇게 쉽게 흔들리는 걸 처음 봤다. "가족 간의 작은 다툼이 왜 신방 문을 잠그고 벌어지는지 모르겠네요." 선우진의 시선이 이지안에게 잠깐 머물렀다. 그 짧은 시선에도 이지안은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이쪽은, 결혼식에서 뵌 신부님과는 다른 분인 것 같은데." 그 한마디에 이지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입술까지 하얗게 변해서,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손끝이 옷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나는 이 순간 침착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흥분해서 좋을 게 없었다. 여기서 목소리를 높이면, 그저 시끄러운 딸 하나가 늘어날 뿐이다. 사실만 명확히 전달하면 된다.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백작님과 백작부인께서, 결혼식 이후 저를 여동생과 바꾸려고 하셨습니다." 나는 최대한 담백하게 말했다. 목소리에 억울함이나 원망 같은 걸 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 감정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나는 이미 오래전에 배웠다. "위자료 문제로 여동생에게 돈이 필요했고, 저를 대신해서 여동생이 공작님의 부인이 되면 될 거라고 판단하신 것 같습니다." 선우진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 표정만으로는 이게 놀란 건지, 재미있어하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런 계획을, 이렇게 순순히 말씀해주시는군요." "숨길 이유가 없으니까요. 저는 사기에 동참할 생각이 없습니다." 말을 뱉고 나니, 속이 조금 후련해졌다. 정말이었다. 이 결혼에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집안 사람들을 감쌀 이유도 없었다. 사실을 그대로 말하는 것, 그게 지금 나한테는 가장 쉬운 선택이었다. 아버지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얼굴이 이제는 붉어졌다가 하얗게 질리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오해입니다, 오해예요. 아이가 놀라서 말을 지나치게……" "오해요." 선우진은 그 말을 그대로 되받았다. 웃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 웃음에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나는 이 사람 앞에서 거짓말을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겠다는 걸 확신했다. "아버지께서 이 일을 아시면 뭐라고 하실지 궁금하군요." 그 말에 방 안의 온도가 한층 더 낮아지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아예 말을 잃었고, 이지안은 이제 눈물까지 글썽이며 아버지 뒤로 반쯤 몸을 숨겼다. 나는 이 상황을 지켜보며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이 사람, 선우진은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있다는 것. 단순히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려는 태도가 아니었다. 뭔가, 이 소란을 이용하려는 낌새가 느껴졌다. 마치 이 상황이 자기한테 유리한 패라도 되는 것처럼, 여유롭게 이쪽저쪽을 관찰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그 질문을 되뇌었다. 답은 나오지 않았다. 선우진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서아 양. 잠시 저와 이야기를 나누시겠습니까. 이 일을 정리하기 위해서요." "저는……" 대답을 하기 전에, 어머니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저희 딸은 아직 정신이 없어서요, 나중에……" "부인." 선우진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날카로워졌다. 그 한마디에 방 안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신부 본인이 아니라 부모님이 대답을 대신하려는 게, 오히려 의심을 더 사는 겁니다." 어머니는 입을 다물었다. 얼굴에 핏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나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이 순간, 나는 이 사람과 함께 이 방을 나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여기 남아 있는 건, 부모와 이지안에게 계속 휘둘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어차피 이 방 안에서는 누구도 내 말을 진심으로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네,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나는 선우진을 따라 방을 나섰다. 뒤에서 아버지가 뭐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본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복도는 방보다 훨씬 서늘했다. 발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며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이 저택이 이렇게 넓고 차가운 곳이었나 새삼 생각했다. 복도를 걸으며 선우진이 문득 말했다. "아버지께서 후처를 모집하실 때, 조건 하나를 정확히 못 박으셨습니다." "어떤 조건이요." "어떤 상황에서도 불평 없이 함께할 수 있는 사람." 그는 나를 돌아보며 옅게 웃었다. "이서아 양은, 그 조건에 상당히 잘 맞는 분 같군요." 그 웃음이 어딘가 걸렸다. 칭찬처럼 들리는데, 이상하게 안심이 되지 않았다. 마치 내가, 어떤 시험을 통과한 것처럼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대체 이 사람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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