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이지안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마치 이게 별일 아니라는 듯이.
그 웃음이 문제였다. 평소라면 저 웃음에 속아 넘어갔을 거다. 이지안은 늘 그런 식이었으니까. 사고를 쳐도 웃었고, 거짓말을 해도 웃었고, 남을 궁지에 몰아넣으면서도 웃었다. 어렸을 적엔 저 웃음이 순진해서 그런 줄 알았다. 지금은 안다. 저건 계산된 표정이다.
"언니, 이해해줘. 나 위자료 갚을 방법이 이거밖에 없대."
목소리마저 태평했다. 남의 결혼식을, 남의 인생을 가로채면서 이렇게 가볍게 말할 수 있다니.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삼켰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자세히 말해."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놀라서 소리를 지를 상황이 아니었다. 침착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흥분하는 쪽이 지는 거다. 예순 넘게 살면서 배운 게 딱 하나 있다면, 화를 낼수록 상대는 더 여유로워진다는 것.
"엄마가 그랬어. 공작한테 언니가 병약해서 대신 내가 왔다고 하면 된다고. 어차피 공작은 언니 얼굴도 제대로 모르잖아. 초상화만 봤을 텐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 결혼은 얼굴 한 번 못 보고 성사된 정략혼이었다. 초상화 한 장, 서류 몇 장으로 오간 결혼. 그러니 이지안의 말도 얼핏 들으면 그럴듯했다.
하지만 오늘 낮에, 나는 이미 그를 직접 만났다. 그의 얼굴을 보았고, 그도 내 얼굴을 보았다. 잠깐이었지만 분명했다. 그 서늘한 눈빛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공작님은 이미 나를 봤어. 오늘 식에서."
이지안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반가웠다. 드디어 저 여유로운 얼굴에 균열이 갔다는 게.
"그, 그건……"
말을 잇지 못했다. 예상 못 한 변수였을 거다. 어머니와 이지안 둘 다, 내가 그 자리에 나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겠지. 아니면 잠깐 얼굴을 비춘 정도는 상관없다고 여겼거나.
"어머니가 그걸 계산 못 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은 담담하게 나왔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이 집안은 늘 이런 식이었다. 나를 빼고 계획을 짜고, 나를 빼고 결정을 내리고, 나에게는 통보만 했다. 예순 넘어 다시 스물몇으로 돌아온 지금도 그 습성은 그대로였다.
나는 이지안을 지나쳐 방문 손잡이를 잡았다. 잠겨 있었다.
"열어."
"언니, 제발."
이지안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이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저 애가 이렇게 절박한 얼굴을 할 줄도 아는구나.
"나 진짜 갈 데가 없어. 위자료 못 갚으면 나 아마 감옥 가거나, 아니면……"
말끝을 흐렸다. 뒤에 이어질 말이 뭔지는 짐작이 갔다. 팔려가거나, 죽거나. 이 세계에서 여자에게 남은 선택지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솔직히 조금은 흔들렸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나. 이 상황에서도 동생이라고, 마음 한 귀퉁이가 저릿하긴 했다.
하지만 그 감정을 곧바로 눌러 없앴다. 지금 흔들리면, 이지안이 아니라 내가 그 감옥에, 그 팔려가는 자리에 서게 될 거였다.
"그건 네가 저지른 일이야."
냉정하게 들릴지 몰라도, 사실이었다. 위자료를 만든 것도, 그 빚을 갚을 방법을 이렇게밖에 찾지 못한 것도, 전부 이지안의 선택이었다. 내가 대신 짊어질 이유는 없었다.
그 순간 방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잠겨 있던 문이었는데도, 밖에서 열쇠로 열린 모양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들어섰다.
두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미 이 방 안의 대화를 어느 정도 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표정에 여유가 없었다.
"서아, 소란 피우지 말고 얌전히 나와라."
아버지의 목소리는 명령형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 집에서 아버지의 말은 늘 이런 식이었다. 설명 없는 명령, 반문을 허락하지 않는 어조.
어릴 때는 저 목소리가 무서웠다. 지금은 그냥 지겨웠다.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은 해주셔야죠."
"설명할 필요 없다. 그냥 지안이랑 자리를 바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자리를 바꾸라니. 결혼식 상대를 물건 바꾸듯 말하는 저 태도가 놀랍지도 않았다. 이 집안에서 나는 늘 그런 물건이었으니까.
"공작님은 이미 저를 보셨어요. 아세요?"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다."
"알아서 어떻게 할 건데요?"
"병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서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다고 하면 될 일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데 아버지의 표정은 진지했다. 정말로 그렇게 넘어갈 수 있다고 믿는 얼굴이었다. 순간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공작이 그렇게 어리숙한 사람일 리가 없었다. 잠깐 마주친 눈빛만으로도, 저 남자는 웬만한 거짓말에 쉽게 속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버지."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건 사기예요. 공작가를 상대로 하는."
"사기라니, 그렇게 험한 말을 쓰지 마라. 우리는 그저 사정을 조율하는 거다."
조율. 참 편한 단어네, 이런 상황에도. 사람을 바꿔치기하는 것도 조율이라 부르면 다 괜찮아지는 건가.
"조율이요? 사람을 바꿔치기하는 게 조율이에요?"
아버지의 눈가가 씰룩였다. 반박할 말이 없으면 늘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걸 나는 잘 알았다.
어머니가 나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서아, 너는 원래 이런 화려한 자리 안 좋아했잖아. 조용히 물러나면 다 편해져."
조용히 살고 싶었던 건 맞다. 화려한 무도회니, 사교계 소문이니, 그런 것들에 얽히고 싶지 않았던 것도 맞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사기의 도구가 되면서까지 조용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조용함과 굴복은 다른 거니까.
어머니의 손을 슬쩍 피했다.
"싫어요."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짧은 대답에 부모님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뭐?"
아버지의 목소리가 커졌다. 명령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의 반응이었다.
"저는 이 방에서 나가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이건 공작님께 바로 알릴 거고요."
"서아!"
어머니가 소리를 높였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 순간을 위해 예순 넘게 살고, 다시 스물몇 살로 태어난 게 아니었다. 그냥 또 다른 착취를 견디려고 이 결혼을 받아들인 게 아니었다. 전생에서도 나는 늘 남을 위해 참고, 남을 위해 물러났다. 그 대가로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번 삶에서만큼은, 적어도 이런 식으로 이용당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저를 강제로 이 방에서 내보내신다면, 저는 공작가 사람들 전부 앞에서 이 일을 밝힐 거예요."
말을 내뱉으면서도 손끝이 살짝 떨렸다. 두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 물러서면, 이 순간이 앞으로의 모든 순간을 결정할 것 같았다.
아버지의 얼굴이 처음으로 하얗게 질렸다.
그 표정을 보는 게, 이상하게도 후련했다.
그 순간, 방문 밖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에서 무슨 소리가 이렇게 큰가."
모두가 동시에 굳었다.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어머니는 손을 떨어뜨렸고, 아버지는 입을 다물었다. 이지안조차 숨을 죽였다.
문이 다시 열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 있던 건, 공작이 아니었다.
스물 안팎으로 보이는, 공작과 닮은 눈매를 가진 남자였다.
낮게 깔린 목소리. 여유롭게 팔짱을 낀 자세. 그리고 이 방 안의 상황을 이미 다 파악한 듯한, 서늘한 눈빛.
누구지. 저 눈매,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