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아버지가 나를 불러 세운 건 저녁 식사가 끝난 직후였다.
식탁 위에는 아직 치우지 않은 그릇들이 어수선하게 놓여 있었고, 하인들은 눈치를 보며 방 밖으로 슬금슬금 빠져나가고 있었다. 뭔가 큰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저들도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선우현 공작과 혼인하기로 했다."
숨도 안 쉬고 나온 그 한마디에, 나는 수프 그릇을 내려놓다가 손이 살짝 미끄러졌다. 그릇이 접시 위에서 딸그락, 소리를 냈다.
놀란 건 아니었다. 이미 예상했으니까.
다만 이렇게 빨리 확정될 줄은 몰랐다. 나는 최소 한 달은 더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버지의 성급함은 언제나 내 예상을 앞질렀다.
나는 예순 몇 해를 살다가 죽었다. 남편은 먼저 떠났고, 자식들은 각자의 삶을 살러 갔고, 나는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 늙어가다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스물셋 이서아의 몸속에 있었다.
처음엔 당황했다. 어쩌겠어, 누구라도 당황했겠지. 갑자기 낯선 몸에, 낯선 얼굴에, 낯선 이름으로 살아가야 한다는데 담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며칠 살아보니 알겠더라. 이 집이 나를, 원래의 이서아를 어떻게 대해왔는지.
이태준 백작의 장녀. 영지 경영에는 관심도 재능도 없는 아버지와, 나를 미워하는 게 유일한 취미인 듯한 어머니 한미경, 그리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여동생 이지안. 그 사이에서 나는 십몇 년째 종처럼 부려지고 있었다.
집안의 온갖 잡무는 내 몫이었다. 영지 회계도, 손님 접대도, 심지어 이지안의 뒤치다꺼리까지도. 그런데 정작 이 집에서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억울했다면 억울한 일인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다지 억울하지 않았다. 어차피 한 번 죽어본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
"그, 그러니까 이건……"
말을 고르는 나를 보며 아버지는 짜증스레 미간을 좁혔다. 그 표정, 늘 저랬다. 내가 뭘 말하려고 하면 이미 다 안다는 듯한 얼굴로 말을 끊어버리는.
"뭘 그렇게 뜸을 들여. 좋은 자리다. 공작이야, 국왕의 삼촌이고."
좋은 자리라는 말은 맞다. 다만 그 좋은 자리가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나에게 떨어졌는지가 문제였다.
이지안이 사고를 쳤다.
기혼 남자와 얽혀서, 상대 집안에서 거액의 위자료를 청구해왔다. 웬만한 영지 하나를 팔아야 할 액수였다. 아버지는 이미 빚이 있었고, 그 빚 위에 또 빚을 얹을 형편이 아니었다.
이지안이 사고를 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놀라기보다는 오히려 헛웃음이 나왔다. 원래의 이서아가 남겨준 기억 속에서도 이지안은 늘 이런 식이었다. 사고를 치고, 뒷수습은 언니가 하고, 그러고도 늘 웃으며 다시 사고를 치는.
그래서 나온 게 이 혼담이었다.
공작가에서 지참금 명목으로 상당한 금액을 미리 지불하기로 했고, 그 돈이 이지안의 위자료를 메꿔줄 거라는 이야기였다. 결국 나는 이 집안의 마지막 재산이었던 셈이다. 팔 수 있는 것 중 가장 값이 나가는.
"저는……"
나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좋습니다."
아버지는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반발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그 표정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그럴 수도 있지. 원래의 이서아라면 울고불고했을지도 모른다. 이 결혼이 얼마나 부당한지, 자신이 왜 동생의 빚을 대신 갚아야 하는지 목소리를 높였을지도.
하지만 나는 다르다.
선우현 공작. 나는 이미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응접실 벽에 걸려 있던 초상화 속 얼굴을, 아버지가 정치적 인맥을 넓히려고 몇 번 초대받았던 저녁 자리에서 곁눈질로 훔쳐봤던 그 사람을.
서른다섯. 은빛이 섞인 짙은 머리카락, 눈매는 깊고 조용했다. 웃을 때는 눈가에 잔주름이 잡혔는데, 그게 이상하게 좋았다. 나는 젊은 남자보다는, 뭔가를 오래 견뎌낸 사람의 얼굴이 좋았다.
전생에서도 그랬다. 어리고 팔팔한 남자보다는, 조용히 나이 든 사람들에게 더 마음이 갔다. 남편도 그랬다. 처음 만났을 때 이미 마흔이 넘었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좋아! 라고 하기엔 상황이 좀 웃기지만, 어쨌든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적어도 얼굴 보면서 소름 돋을 상대는 아니었으니.
"결정이 빠르구나."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내가 뭐라 더 물어볼 기회도 주지 않고, 그는 서재로 향하는 문을 닫아버렸다.
나는 텅 빈 식당에 잠시 앉아 있었다. 그릇을 치우러 온 하녀가 눈치를 보며 다가왔지만, 나는 손을 들어 잠깐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 결혼의 진짜 의미는, 나에게 있어서는 탈출이라는 것.
이 집에서, 이 가족에게서, 조용히 벗어날 마지막 기회.
화려한 신분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나는 그저 아무도 나를 착취하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그저 조용히 살고 싶었을 뿐이다. 예순 몇 해를 살아본 사람의 소망이 이렇게 작다는 게 좀 서글프기도 했지만, 어쩌겠나. 작은 소망일수록 이루기 쉽다는 것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 복도의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벽에 걸린 가족 초상화들이 이지러졌다. 그림 속에서도 나는 늘 구석에 서 있었다.
방문을 열자 하녀 다이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씨, 들으셨어요?"
"들었어."
"공작님이라니…… 정말 대단하시네요."
다이앤의 눈에는 부러움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냥 웃었다.
"뭘 그렇게 놀란 눈으로 봐. 나도 아직 실감이 안 나."
"저라면 벌써 짐 다 싸놨을 거예요."
부러울 게 뭐가 있어. 나는 그냥 가족에게서 도망치는 거야. 다이앤은 그 속을 모르니 저렇게 눈을 반짝이는 거고.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결혼식까지는 아직 두 달이 남아 있었다. 그동안 이 집에서 버텨야 한다. 이지안의 사고 수습, 아버지의 빚, 어머니의 잔소리, 그 모든 것을 견디며. 게다가 결혼 준비도 해야 할 테고, 공작가 쪽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눠야 할 테고,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괜찮아. 예순 넘게 산 인생이면 못 견딜 게 없지. 시댁 눈치 보는 것도, 며느리 노릇 하는 것도, 다 해본 일이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눈을 감으려던 순간,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언니."
이지안이었다. 자다 깬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부르며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손에는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매니큐어 병을 들고 있었다. 이 밤중에 손톱 손질을 하다가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다.
"뭐야, 이 밤중에."
"언니가 그 공작이랑 결혼한다며. 나 진짜 부럽다."
부럽다는 말에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걸린 웃음이 너무 태연했다. 자기 때문에 언니가 팔려가는 거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아니, 모를 리가 없지. 저 뻔뻔함은 다 알면서도 짓는 얼굴이다.
"부럽긴 뭐가 부러워. 넌 이제 위자료 걱정 안 해도 되니 좋겠다, 그런 뜻이지?"
이지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배시시 웃었다.
"어머, 언니도 참. 그런 뜻이 아니라……"
말끝을 흐리는 그 표정 위로, 나는 뭔가 다른 계산이 스치는 걸 놓치지 않았다.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지, 이 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