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산 제물, 살아남기로 했다

3화

다음 날 아침, 세아는 낯선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이불을 걷어차는 것과 동시에 어젯밤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는데, 낯선 성, 낯선 침대, 그리고 낯선 남자……. 세아는 잠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아, 맞다. 나 여기 팔려 온 거였지' 하고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통통한 체구의 시녀장이 서 있었는데, 그녀는 세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화들짝 눈을 크게 떴다. "어머, 진짜 사람이었네요?" 하녀가 손을 모으며 말했다. "저는 리나예요. 사실…… 올해 생贄는 마물 반쪽이라는 소문이 있었거든요." "마, 마물 반쪽이요?" 세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쪽이라니, 그럼 나머지 반쪽은 뭐란 말인가. 상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휴, 이쪽 지방 사람들이 워낙 소문을 부풀리는 거 좋아하잖아요." 리나가 웃으며 아침 식사 쟁반을 내려놓았는데, 그 위에 놓인 음식을 본 세아는 순간 말을 잃었다. 쟁반 위에는 새빨간 육즙이 그대로 흐르는 고기 한 덩이와, 얼음처럼 차가운 국물이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고기 옆에는 마치 예쁘게 장식이라도 하듯 허브 몇 잎이 얹혀 있었는데, 그 정성스러운 배치가 오히려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저, 이건…… 좀 덜 익힌 것 같은데요." 세아가 포크로 고기를 살짝 찔러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육즙이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걸 보니 저절로 얼굴이 굳었다. "북부에서는 이게 정상이에요. 마물의 고기는 완전히 익히면 영양이 다 날아가거든요. 그리고 공작님은 뜨거운 걸 아예 못 드세요." 리나가 아무렇지 않게 설명했다. "공작님이…… 뜨거운 걸 못 드신다고요?" "네, 얼음 속성 마력이 워낙 강하셔서, 뜨거운 음식을 드시면 몸에서 반발이 일어난다고 하더라고요. 여름에도 화로 옆에 앉아 계시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손님들이 오면 다들 덜덜 떨면서 차라도 데워달라고 하는데, 공작님만 시원한 얼음물을 찾으신다니까요." 세아는 그 말을 들으며, 어젯밤 서관 창밖으로 들리던 짐승 울음소리가 사실은 마물이 아니라 성 안에서 기르는 무언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조심스레 물어보니, 리나는 눈을 반짝이며 신이 나서 설명을 이어갔다. "아, 그거요? 공작님이 기르시는 설표예요. 이름이 없어서 다들 그냥 '그놈'이라고 불러요." "이름이…… 없다고요?" 세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오래 곁에 두고 기르는 짐승에게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는다니, 어쩐지 서글픈 이야기 같았다. "공작님이 이름 짓는 걸 되게 싫어하세요. 정 붙이면 헤어질 때 아프다고, 그러시더라고요." 리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성 안에서 그 얘기 꺼내면 다들 입 다물어요. 뭔가 사연이 있으신가 봐요." 그 말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지만, 세아는 일단 눈앞의 아침 식사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결국 반쪽만 겨우 삼키고 나서—정확히는 국물만 조심스레 홀짝이고 고기는 슬쩍 접시 구석으로 밀어놓는 방식으로 위기를 넘기고—정원으로 나섰는데, 그곳에서 처음으로 강도윤이 기른다는 설표와 마주쳤다. 거대한 몸집의 설표가 나무 그림자 아래 웅크리고 있다가, 세아를 발견하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새하얀 털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그 짐승은, 얼핏 보면 무섭기보다는 신비로울 만큼 아름다웠다. 마치 겨울 산맥 자체가 짐승의 형태로 응축된 듯한 모습이라, 세아는 잠시 숨을 죽이고 서 있었다. "저, 저기…… 안녕." 세아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는데, 설표는 대답 대신 커다랗게 하품을 하고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그 하품 소리마저 어찌나 큼직한지, 세아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뒷걸음질쳤다. "무시당했네." 세아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사람도 아니고 동물한테마저 이런 취급을 받다니, 이 성에서 내 서열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온다 싶었다. 그때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이 낯선 사람을 잘 경계하지 않는 건 드문 일이다." 돌아보니 강도윤이 서 있었는데, 낮 시간에는 마주칠 일이 없다던 말과 달리 오늘은 웬일로 정원을 지나던 참이었다. 은발이 아침 햇살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고, 표정 없는 얼굴은 마치 세필로 그려낸 조각처럼 정갈했다. 그는 세아 옆에 다가와 설표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보통은 으르렁대며 도망치라고 위협하는데." "그, 그럼 저는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일까요?" 세아가 조심스레 웃으며 물었다. "아니면 그냥 게을러서 움직이기 싫었던 것일 수도 있지." 강도윤이 무심하게 답하자, 세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 소리가 낯설다는 듯 강도윤이 살짝 눈을 크게 떴다. 마치 누군가 웃는 소리를 처음 들어본 사람처럼. "왜, 왜 그렇게 보세요?" "……아니다." 그는 시선을 돌리며 짧게 헛기침을 했다. "음식은 입에 맞았나." "덜 익은 고기는…… 조금 적응이 필요할 것 같아요." 세아가 솔직하게 답하자, 강도윤은 잠시 생각하더니 뜻밖의 말을 꺼냈다. "주방에 일러 익힌 고기를 따로 준비하라 하겠다. 남부에서 온 사람이 갑자기 이곳 식성에 맞추긴 어려울 테니." "아, 아니에요, 괜찮……." "괜찮지 않은 얼굴로 말하는군." 강도윤이 담담하게 지적하자, 세아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생각보다 세심한 사람이었다. 소문 속의 냉혹한 처형인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어서, 세아는 이 낙차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그저 눈만 깜빡였다. 서류상 계약으로 팔려 온 처지에, 이렇게까지 신경 써줄 이유가 없을 텐데. "그,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시는 거예요?" 세아가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강도윤은 잠시 침묵했다. 설표의 귀 뒤를 쓰다듬던 손이 멈추고, 푸른 눈동자가 안개 낀 숲처럼 흐려지는 듯했다. "손님을 굶기면 예의가 아니라 배웠을 뿐이다." 그가 짧게 답했지만, 세아는 왠지 그 말속에 다 담기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 감사합니다." 세아가 결국 순순히 고개를 숙이자, 강도윤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성 안쪽으로 걸어갔다. 설표가 그 뒤를 느긋하게 따라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세아는 두 사람—아니, 한 사람과 한 짐승—의 뒷모습이 어쩐지 닮았다고 생각했다. 무심한 듯 굴면서도 서로를 향해 걸음을 맞추는 그 모습이. 세아는 이곳에서의 하루하루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 덜 익은 고기와 이름 없는 설표, 그리고 뜨거운 걸 못 먹는 공작님까지, 이상한 것들투성이인 성이었지만, 적어도 이 성의 주인은 소문처럼 무자비하지만은 않은 듯했다. 그러나 그 기대가 얼마나 오래갈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정원 구석에서, 설표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세아를 돌아보았다. 푸른 눈동자에 담긴 것이 경계인지 호기심인지, 세아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