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성문 앞에 선 채로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는데, 그 침묵이 얼마나 길게 이어졌는지 세아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살을 벨 듯한 겨울바람이 성벽 틈새로 스며들어 옷깃을 파고들었지만, 세아는 추위보다 이 낯선 존재가 주는 위압감에 더 크게 몸이 떨렸다. 강도윤은 여전히 미간을 좁힌 채로 그녀를 살피고 있었고, 그 시선에는 경멸도 두려움도 아닌, 뭐라 설명하기 힘든 낯선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이 사람이 정말 그 소문의 빙결 처형인이란 말인가. 세아는 속으로 되물으며 강도윤을 슬쩍 훔쳐보았다. 서리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 마치 세필로 그린 그림 속 인물 같았고, 안개 낀 숲처럼 짙은 눈동자는 사람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해 저절로 시선을 피하게 만들었다.
"마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군." 그가 나직이 중얼거리자, 세아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이제 곧 실망한 얼굴로 자신을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지난 십칠 년간 살아온 인생이, 이 성문 앞에서 이렇게 끝나는구나 싶었다.
"죄송합니다." 세아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는 마력이 부족하여…… 생贄로서도 그리 쓸 만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원하신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지금 이 자리에서 뭘 하겠다는 것이냐." 강도윤이 말허리를 자르며 되물었는데, 그 목소리에는 어이없다는 기색이 살짝 섞여 있었다.
"……." 세아는 차마 '목숨을 거두어 가시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그저 입술을 깨물었다. 손끝이 차갑게 굳어가는 것이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스스로도 분간할 수 없었다.
강도윤은 그런 세아를 잠시 응시하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들어와라. 밖은 춥다."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세아는 어리둥절한 채로 그의 뒤를 따라 성문을 넘었는데, 안으로 들어서자 회백색 돌로 지어진 거대한 성채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곳곳에 서린 서리와 얼음 장식이 오히려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였고, 높이 솟은 첨탑들 사이로 스며드는 희미한 달빛이 얼음 조각들에 반사되어 마치 성 전체가 은빛으로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광경을 눈앞에 두고도 죽음을 걱정해야 한다는 사실이 우습기까지 했다.
집사로 보이는 노인이 다가와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공작님, 이분이……."
"올해의 생贄다." 강도윤이 짧게 답했다. "당분간 서관에 거처를 마련해라."
"당분간이라니, 그게 무슨……." 세아가 조심스레 물었지만, 강도윤은 이미 앞서 걷고 있었다. 세아는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라가며, 도대체 이 냉혹하다는 공작이 왜 자신을 곧바로 처리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처형인이라면서 손님방을 내주는 것도 이상하고, 저렇게 성큼성큼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자신이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서관에 도착하자 강도윤은 팔짱을 낀 채로 몇 가지 규칙을 나열하기 시작했는데, 그 말투가 마치 계약서를 낭독하는 관리처럼 딱딱했다.
"첫째, 본관 지하와 북쪽 탑에는 발을 들이지 마라. 위험한 것들이 있으니." 그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했다. "둘째, 식사는 정해진 시간에만 제공된다. 셋째…… 나는 낮보다 밤에 활동하는 편이니, 낮 동안은 웬만하면 마주칠 일이 없을 것이다."
세아는 그 규칙들을 들으며 속으로 헤아려 보았다. 지하와 탑은 피하고, 밥은 정해진 시간에 먹고, 밤에는 마주치지 않는다니…… 이게 정말 처형인이 생贄에게 내리는 규칙이란 말인가. 오히려 하숙집 주인이 세입자에게 하는 잔소리에 더 가까운 것 같았다.
"저, 그럼 저는 언제…… 처, 처분되는 건가요?" 세아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강도윤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처분이라니. 사람을 그런 식으로 취급할 만큼 내가 야만적으로 보이나."
"소, 소문에는……." 세아는 말끝을 흐렸다가, 이내 마음을 다잡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빙결 처형인이라 불리신다고 들었습니다. 남부 귀족들이 정신을 놓거나 도망친다는……. 마경에 바쳐진 생贄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그 말에 강도윤은 잠시 헛웃음을 흘렸는데, 그것은 세아가 처음 본 그의 표정 변화였다. 서리처럼 무표정하던 얼굴에 옅은 웃음이 스치자, 세아는 순간 그 얼굴이 생각보다 훨씬 젊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 당황했다. "그들은 이곳의 추위와 마물을 감당하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딱히 아무도 죽이지 않았는데."
"……정말요?"
"정말이다." 그는 짧게 답한 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보라가 서서히 몰아치기 시작하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는 그의 옆모습이, 조금 전까지 세아를 얼어붙게 만들었던 그 냉혹한 인상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생贄라는 명목으로 사람을 보내는 관습 자체가 우스운 짓이지. 나는 그저 마경의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 특정한 힘을 지닌 자가 필요할 뿐이니, 네가 정말 마력이 없다면……."
그가 말을 잠시 멈추자, 세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다음 말이 무엇일지에 따라 자신의 목숨이 갈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귓가에 들릴 정도였다.
"……달리 쓸 곳을 찾아보면 될 일이다." 강도윤이 무심하게 말을 맺었다. "당장 너를 해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고 지내라. 다만, 규칙은 지켜야 한다."
세아는 그 순간 안도감이 밀려오면서도, 동시에 정확히 명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 한구석에서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죽음을 각오하고 온 곳에서, 이렇게 사람 대접을 받을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세아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세아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감사할 것 없다. 그저 내 성에서 죽어나가는 사람이 늘어나면 뒤처리가 귀찮을 뿐이니까." 강도윤은 그렇게 무뚝뚝하게 덧붙이며 방을 나섰는데,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세아는 왠지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냉혹한 처형인이라는 소문과는 전혀 다른, 어딘가 어설프게 다정한 사람 같았기 때문이었다. 뒤처리가 귀찮다는 말 뒤에 숨겨진 마음이 무엇인지, 세아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왠지 그 말이 거짓처럼 들리지 않았다.
노인이 세아에게 방을 안내해 주며 이런저런 것들을 설명해 주었지만, 세아의 머릿속에는 강도윤이 마지막으로 던진 말과 그 뒷모습만이 자꾸 떠올랐다. 창밖으로는 눈보라가 서서히 몰아치기 시작했고, 성 안 어딘가에서 낮게 울리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세아는 그 소리에 다시 한번 몸을 떨었지만, 이번의 떨림은 조금 전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마치 이 성이, 그리고 이 성의 주인이, 앞으로 자신의 삶에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얽혀들 것을 예고하는 듯한, 그런 서늘하고도 낯선 떨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