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도현이 알아온 정보는 예상보다 훨씬 복잡했다.
"태민 도련님, 원래 몸이 약했대."
도현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우리는 학원 뒤편, 사람이 잘 안 오는 정원 구석 벤치에 앉아 있었다. 바람이 조금 세게 불어와 도현의 앞머리가 흩날렸는데, 그 와중에도 목소리는 참 은밀하게 낮췄다.
'분위기는 스파이 영화 찍는 줄 알겠네.'
"어릴 때부터 병치레가 많았고, 후작가에서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더라. 그래서 하준 도련님이랑 정혼 얘기가 나온 것도, 사실은 태민 도련님 쪽에서 먼저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거래."
"그건 나도 아는 얘기잖아."
"끝까지 들어봐."
도현이 손가락으로 벤치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초조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아니면 그냥 잘난 척하는 버릇이거나.
"근데 재밌는 게, 태민 도련님이 그렇게 하준 도련님한테 매달린 게, 정략적인 이유가 좀 섞여 있었다는 거야. 백작가랑 후작가가 손을 잡으면 서로한테 이득이 크니까."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그 열정적인 구애가, 완전히 진심은 아니었다는 거야?'
그림 속에서, 사진 속에서 봤던 태민의 표정들이 떠올랐다. 하준을 향해 그렇게 눈을 반짝이면서 웃던 얼굴이. 그게 계산이었다고?
"근데 그게 이제 와서 왜 중요해? 사고랑 무슨 상관인데."
"상관 있지. 사고 자체가 좀 이상해."
도현이 목소리를 더 낮췄다. 이제는 거의 속삭이는 수준이었다.
"마부 말로는, 사고 직전에 말들이 갑자기 이상 반응을 보였대. 원인을 알 수가 없다고."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단순 사고가 아니었다는 거야?'
"말들이 왜 이상 반응을 보였대? 뭐 놀랄 만한 게 있었나?"
"그것도 몰라. 마부도 그냥 그 순간엔 정신이 없었다니까. 갑자기 말들이 앞다리를 들면서 날뛰었다는 거밖에는."
"목격자는 없었어?"
"몇 명 있긴 한데, 다들 얘기가 조금씩 달라. 어떤 사람은 뭔가 검은 물체가 지나갔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냥 바람 소리에 놀란 거라고 하고."
나는 팔짱을 낀 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말이 검은 물체를 보고 놀랐다, 라니. 그거 진짜 소설에나 나올 법한 얘기 아니야?'
"확실한 건 아니야. 그냥 소문 수준이지."
도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근데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있어."
"뭔데."
"태민 도련님 사고 나기 전날 밤에, 하준 도련님이랑 크게 다퉜다는 얘기가 있어. 이유는 아무도 정확히 몰라."
나는 그 말에 잠깐 숨을 멈췄다.
'다퉜다고?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준은 나에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하준이 나한테 그렇게 깊은 얘기를 할 사이도 아니었지만. 생각해 보면 하준은 나에게 자기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태민에 관한 것도, 자기 마음에 관한 것도. 그저 필요한 말만, 딱딱하게.
'다투고 그 다음 날 사고가 나고, 태민이 기억을 잃었다.'
우연이라면 지나치게 절묘한 우연이었다.
"싸운 이유는 정말 아무도 몰라? 하인들도?"
"하인들 말로는 그날 밤에 하준 도련님 방에서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는 것 정도. 그 뒤로 태민 도련님이 화난 얼굴로 나가는 걸 봤다고 하고."
"화난 얼굴로?"
"응. 근데 그다음 날 아침에 사고가 났으니까, 그 화가 어디까지 이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지."
"그거, 하준한테 물어볼 수는 없잖아."
"당연히 안 되지. 안 그래도 힘든 사람 붙잡고 뭘 물어보겠다는 거야."
도현이 나를 흘겨봤다.
"그럼 어쩌자는 거야."
"일단은 지켜보는 거지. 태민 도련님 쪽으로 조금씩 접근해보는 것도 방법이고."
"접근이라니, 어떻게. 나 후작가 도련님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도 없어."
"그건 이제 만들면 되지."
도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이 왠지 얄미웠다.
'쉽게 말하네, 이 자식이. 지가 가서 접근할 것도 아니고.'
"너는 뭐 할 건데."
"난 계속 정보 캐는 거지. 각자 역할이 있는 거야."
"편하게 산다, 진짜."
하지만 그 말이 맞기도 했다. 앉아서 소문만 듣고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직접 움직이는 게 나았다. 어차피 나는 이 세계에서 조연도 아니고 그냥 배경 취급 받는 인물이었으니까, 뭘 하든 크게 티도 안 날 터였다.
'그래, 밑져야 본전이지.'
그러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의무동에서 퇴원한 태민이 다시 학원 수업에 나오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렸고, 학원 측에서는 그를 특별히 배려해 몇몇 온화한 학생들과 조를 짜주었다는 얘기도 함께 돌았다. 후작가 도련님이니 뭐니 해도 결국은 열여덟 살짜리 학생이었고, 학원 입장에서는 후작가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 조에, 내가 신청했던 도서관 정리 봉사 명단이 겹쳤다.
순전히 우연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도현이 학원 사무처에 아는 사람을 통해 슬쩍 손을 써준 결과였지만, 겉보기엔 완벽한 우연이었다.
"진짜 이런 것까지 손을 쓸 수 있는 거야?"
내가 놀라서 물었을 때, 도현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이 학원 다닌 지가 몇 년인데. 사무처 서기 누나랑 좀 친해."
"…그 친함의 기준이 궁금하긴 한데, 지금은 넘어가자."
도서관 서고 앞에서 나는 태민과 처음으로 마주쳤다.
그는 붕대를 이마에서 뗀 채였고, 얼핏 보면 사고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갈색 머리는 조금 헝클어져 있었고, 교복 셔츠 소매는 단정하게 접혀 있었다. 겉모습만 보면 그냥 평범하게 아픈 데 없이 자란 도련님이었다.
하지만 눈빛이 달랐다. 예전 사진 속에서 봤던, 하준을 향해 늘 활짝 웃던 그 눈빛과는 완전히 다른, 경계심 짙은 눈이었다. 마치 처음 보는 세상을 낱낱이 의심하는 것 같은.
"…누구세요?"
태민이 나를 보며 물었다. 목소리에 미묘한 긴장이 섞여 있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구나.'
등에서 식은땀이 살짝 배어 나왔다. 어쩐지 이 순간이, 이 세계에 들어온 이후로 가장 중요한 갈래길처럼 느껴졌다.
"윤서아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같은 봉사조예요."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인사를 건넸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배에 힘을 꽉 주었다.
태민은 잠깐 나를 훑어보았다. 위에서 아래로, 아주 짧게. 마치 내가 위험한 존재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더니 별다른 대답 없이 시선을 서고 쪽으로 돌렸다.
'뭐야, 이 무시하는 태도는.'
서운한 감정이 살짝 스쳤지만, 곧바로 다른 생각이 그 자리를 채웠다.
'아니, 오히려 잘된 건가.'
그 무심한 반응이, 오히려 나에게는 다행스러웠다.
적어도 그는 나를 향해 손을 떨거나, 물건을 던지지는 않았으니까. 사고 이후로 신경이 예민해진 도련님이 낯선 사람만 봐도 발작을 일으킨다는 소문도 있었으니, 이 정도면 상당히 온화한 반응인 셈이었다.
'일단 시작은 나쁘지 않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의 뒤를 따라 서고 안으로 들어갔다.
서고 안은 먼지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은은하게 섞여 있었다. 태민은 익숙한 듯 서가 사이를 걸으며 손끝으로 책등을 훑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이 사람이, 기억을 잃기 전에는 하준을 그렇게 좋아했다는 거지.'
지금 이 무표정하고 날 선 얼굴만 보면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저쪽 칸부터 정리하면 될까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태민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짧게 대답했다.
"…아무데나요."
말투는 예의를 갖추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온도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가까운 서가로 다가갔다.
'그래, 하루아침에 친해지자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가자.'
책을 정리하는 척 태민의 동선을 살피던 나는, 그가 유독 한 서가 앞에서 오래 멈춰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마차와 관련된, 낡은 역사서들이 꽂혀 있는 칸이었다.
'설마, 저 사람도 사고에 대해서 뭔가 알아보고 있는 건가.'
그 순간 태민의 손끝이 아주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히 보았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기억을 잃었다고 했는데. 그런데 왜 저런 반응을 보이지?'
궁금증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함부로 말을 걸지 못했다. 대신 조용히 책을 정리하는 손을 움직이며, 곁눈질로 그를 계속 지켜보았다.
그러다 태민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뭘 그렇게 보세요?"
나는 순간 등에 식은땀이 확 솟았다.
'들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