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다음 날 아침, 나는 결심했다.
하준을 구원하겠다는 마음, 태민의 기억을 어떻게든 되돌리겠다는 막연한 목표를 품고 있었는데, 딱 사흘 만에 그게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깨달았다.
'구원이라니. 내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았지.'
의무동에서 태민을 진찰한 의사가 학원장에게 정식으로 보고를 올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단순 기억상실이 아니라 성격 자체가 변형된 사례로, 지속적인 관찰이 필요하다.'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고, 소문을 전해준 애가 말했다.
소문이라는 게 원래 부풀려지기 마련이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다들 목소리를 낮추고 얘기했다. 마치 그게 우리 반에도 옮을까 봐 조심하는 것처럼.
'옮는 병도 아닌데.'
지속적인 관찰이 필요하다는 건, 다르게 말하면 이게 한 번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태민은 정신을 차린 뒤로 몇 번이나 발작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준의 이름만 나와도 손을 떨었고, 하준이 준 선물이 방에 있는 걸 보면 그걸 집어 던졌다. 한번은 하준이 보낸 시녀에게 컵을 던졌다는 얘기까지 돌았다.
그 얘기를 전해준 애는 신이 나서 말했다.
"컵에 맞았대, 그것도 팔에. 시녀가 울면서 나갔다더라."
"……그래."
나는 짧게 대답했다. 딱히 웃을 일도 아니었는데, 그 애 얼굴엔 은근한 재미가 묻어 있었다.
'남 얘기니까 재밌겠지. 나도 그랬던가.'
아니,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이건 내가 알던 태민이었다. 아니, 알던 태민이 아니게 된 지금의 태민이었다. 어느 쪽이든,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 소문을 듣고 나는 하준을 찾아갔다.
회랑 끝, 그가 자주 앉아 있는 벤치였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회랑 기둥 사이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하준은 그 빛을 등지고 앉아 있어서, 얼굴에 그늘이 반쯤 걸려 있었다.
"괜찮아요?"
"괜찮지, 서아."
하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늘 그랬던, 눈이 웃지 않는 웃음이었다.
'괜찮은 사람이 저런 얼굴을 하나.'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캐물을 수도 없었다. 우리는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가까이 다가가 벤치 옆에 앉았다. 하준의 손등에 작은 상처가 나 있는 게 보였다. 반쯤 아문, 그래도 최근에 생긴 게 분명한 상처였다.
"손은 왜……."
"아, 이거."
하준이 손을 슬쩍 옷소매로 가렸다.
"별거 아니야. 넘어졌어."
'넘어졌겠지, 그래.'
넘어져서 생긴 상처가 아니라는 건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물어봐도 대답해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태민이 좀 나아지면……, 다시 얘기해보려고."
하준이 무릎 위에 놓인 손을 꼭 쥐며 말했다.
"괜히 자꾸 다가가면 그 사람이 더 불편해할까봐, 요즘은 좀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어."
멀리서 지켜본다는 말이, 나에게는 유독 익숙하게 들렸다.
'나도 그렇게 몇 년을 살았는데.'
몇 년이라니. 정확히 세보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늘 그런 식이었다. 손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절대 닿지 않는 거리를 두고, 그저 바라만 보는.
"멀리서 지켜본다고, 뭐가 나아져요?"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하준이 나를 돌아봤다.
"글쎄. 그래도 뭐라도 하고 있다는 기분은 드니까."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뭐라도 하고 있다는 기분. 나도 그 기분을 잘 알았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못 하면서, 그저 지켜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는 그 얕은 기분.
그날 오후, 나는 오빠인 한도현을 찾아갔다.
한도현은 나와 같은 남작가의 아들이었다. 신분이 같아서 편하게 말을 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원래는 동성 정혼 얘기가 나왔을 때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던 쪽이었는데, 요즘은 조금 달라진 눈치였다.
도서관 구석 자리, 도현은 늘 거기 있었다. 책을 쌓아놓고 딴생각하는 게 특기인 인간.
"강태민 얘기 들었어?"
내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소문이야 하도 많아서 뭐가 진짠지도 모르겠다."
도현이 책을 덮으며 대꾸했다.
"근데 넌 왜 그렇게 신경 써? 이하준 도련님 좋아하는 거 뻔한데, 이럴 때 오히려 좋은 거 아니야?"
그 말에 나는 순간 말이 턱 막혔다.
'좋은 거 아니냐니, 이 인간이.'
마음 한구석이 뜨끔거렸다. 솔직히 나도 잠깐, 정말 잠깐, 그런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으니까.
태민이 하준을 놓아버리면, 어쩌면 나에게도 기회가 오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최악인데.'
손끝이 저릿했다. 마치 누가 내 속을 그대로 들여다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 생각을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하준이가 저렇게 힘들어하는데, 어떻게 그게 좋은 일이야."
도현이 나를 잠깐 빤히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알겠어. 근데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후작가 일이잖아. 남작가 딴 신경 쓸 처지 아닌 거 알지?"
그 말이 맞았다. 나는 이 판에서 아무 힘도 없는 사람이었다.
'힘도 없고, 자격도 없고.'
하준을 구원하겠다는 건, 애초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도현이 팔짱을 끼고 나를 계속 쳐다봤다.
"너, 표정 봐라. 지금도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눈빛인데."
"……아니야."
"거짓말도 못하는 게, 참."
그 말에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웃을 일이 아니었는데도.
그날 밤, 나는 이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태민의 기억은 돌아올 수도, 안 돌아올 수도 있다. 내가 뭘 하든 그건 내 손에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준이 무너지는 걸, 옆에서 그냥 지켜보고만 있는 것도 못 할 것 같았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으니, 낮에 봤던 하준의 손등 상처가 계속 떠올랐다. 넘어져서 생긴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묻지 못했던 내 입.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으면 물어봤어야지.'
'근데 물어봐서 뭐 하는데. 내가 뭘 어쩔 건데.'
머릿속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서로 다투는 기분이었다.
'구원 같은 거 못해도, 옆에는 있을 수 있잖아.'
목표를 바꿨다. 하준을 구하겠다는 거창한 마음 대신, 하준이 무너지지 않게 곁에서 버티는 것.
그리고 태민이 정말 위험한 사람이 되기 전에, 뭐라도 실마리를 찾아보는 것.
소박하지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최선이라기엔 좀 초라한데.'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나았다.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런데 며칠 뒤, 나는 도현에게 다시 찾아갔다. 이번엔 부탁할 게 있었다.
도서관 구석 자리는 이번에도 도현이 차지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 쌓인 책들이 조금 늘어난 것 같기도 하고.
"도현아, 부탁이 있는데."
"뭔데."
도현이 책에서 눈도 안 떼고 대답했다.
"사고 전에 태민이 어땠는지, 정혼이 어떻게 성사됐는지 좀 알아봐줄 수 있어? 너네 아버지가 후작가랑 안면 있잖아."
그제야 도현이 책을 덮고 나를 쳐다봤다. 눈이 가늘어졌다.
"너 진짜 이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딱히 좋은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몰라. 그냥, 해야 할 것 같아서."
도현은 한참 나를 보다가, 결국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볼게. 근데 이거, 진짜 위험한 일일 수도 있어. 후작가 일에 잘못 끼어드는 거잖아."
"알아.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어."
"각오라니, 말은 쉽지."
도현이 책을 다시 펼치며 중얼거렸다.
"뭐가 나올지 나도 모르겠다. 후작가에 도는 얘기들이 다 좋은 것만 있는 게 아니라서."
그때는 그냥 지나가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후작가 정도 되면 좋은 얘기 나쁜 얘기 다 섞여 있는 게 당연하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각오가 얼마나 얕았는지, 나는 며칠 뒤 도현이 알아온 정보를 듣고서야 제대로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