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태민이 눈을 뜬 건 사흘 뒤였다.
학원 안에 있는 의무동, 그중에서도 후작가가 통째로 빌린 별실이었다. 원래 그 별실은 왕족이 다치기라도 하면 쓰라고 마련해둔 곳이라던데, 후작가 위세면 그 정도는 우습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돈 좋다.'
그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드는 나 자신이 좀 한심했다.
소식은 학원 전체에 삽시간에 퍼졌다. 강태민이 살아났다는 것과, 뭔가 이상하다는 것.
처음엔 다들 그저 살아난 것만으로 안심하는 분위기였다. 사흘 내내 복도마다 태민의 생사를 두고 내기 비슷한 걸 하던 애들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눈을 뜨고 하루, 이틀이 지나자 분위기가 묘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시녀들 입에서, 의사들 입에서 흘러나온 몇 마디가 삽시간에 학원 전체를 훑고 지나갔다.
나는 하준을 따라 병문안을 갔다. 정확히는, 하준이 가는 걸 우연히 알게 되어서 슬쩍 따라붙었다.
'우연 아니고 그냥 따라간 거잖아.'
뭐 어때. 걱정되는데 그럼 어쩌라고.
하준은 그날 아침부터 안색이 하얬다.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그가 태민이 눈을 떴다는 소식에 밤새 한숨도 못 잤을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의무동으로 가는 길, 하준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두 배는 빨랐다. 나는 몇 걸음 뒤에서 그 뒷모습을 보며 걸었다. 등이 곧았다. 너무 곧아서, 오히려 그게 더 위태로워 보였다.
병실 문 앞에서 하준이 노크를 했다.
"태민, 나야. 하준."
대답이 없었다.
하준은 잠깐 머뭇거리다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문틈으로 안을 살짝 훔쳐봤다. 시녀나 뭐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할 처지였지만, 이럴 때는 그냥 벽이라도 되고 싶었다.
태민은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이마에 붕대를 감은 채였다. 하얀 병실 조명 아래서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창백해 보였다.
하준이 다가가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누구세요?"
그 한마디가 병실 공기를 완전히 얼려버렸다.
하준의 표정이 무너지는 걸 나는 문 뒤에서 똑똑히 봤다. 눈 깜빡임이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째쯤엔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태민아, 나야. 나 몰라?"
목소리가 다급했다.
"제 이름을 아시는 걸 보면 아는 사이인가 보네요. 근데 저는 기억이 잘……."
태민이 미안한 듯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표정이 문제였다.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딱 처음 보는 사람에게 짓는 예의 바른 미안함. 그게 오히려 더 잔인했다. 화를 내거나 짜증을 냈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의사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머리를 크게 부딪히셔서, 일부 기억에 혼란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돌아올 수도……."
"수도, 라는 건 안 돌아올 수도 있다는 뜻이죠."
하준이 낮게 되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의사는 대답 대신 시선을 피했다. 그것만으로도 답은 나온 셈이었다.
'저 침묵이 제일 잔인한 거지.'
나는 문틈으로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저게 무슨…….'
단순한 기억상실이면 그래도 다행일 텐데. 마차 사고, 정혼자, 갑작스러운 낙마 소문까지 겹쳐서 애들이 이상한 소리를 할까 봐 그것도 걱정이었다.
하준이 태민에게 다시 다가가 손을 잡으려 했다.
"저기, 태민아. 나 이하준이야. 우리……."
"손 놓으세요."
태민이 손을 확 빼며 말했다. 목소리에 거부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저는 낯선 사람이 이렇게 함부로 손대는 거 안 좋아합니다."
하준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나는 문밖에서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이거 심각한데.'
숨을 몇 번이나 삼켰는지 모르겠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저 자리에 하준 대신 내가 서 있었어도 저렇게 담담하게 서 있을 수 있었을까. 아니, 절대 아니었을 거다.
하준은 그날 병실에서 삼십 분을 더 서 있었다고 들었다. 나는 도중에 자리를 떴다. 더 보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남의 슬픔을 구경하는 것도 죄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며칠 뒤, 하준은 태민에게 편지를 썼다. 정혼 초기에 태민이 보냈던 편지들에 대한 답장 같은 형식으로, 두 사람의 추억을 하나하나 적어 보냈다고 들었다.
편지지가 몇 장이었는지, 어떤 문장으로 시작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나는 하준의 방 앞을 지나다가 밤새 켜져 있던 촛불을 봤다. 새벽까지 그 불빛이 꺼지지 않았다.
'뭘 저렇게 열심히…….'
그 마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랐다. 진심으로.
결과는 참혹했다.
태민은 그 편지를 열어보지도 않고 하준이 보는 앞에서 찢어버렸다.
"이런 거 자꾸 보내지 마세요."
"태민아……."
"저는 당신을 모릅니다. 정혼자라는 거 자체가 불쾌해요."
찢어진 편지 조각이 바닥에 흩날렸다는 이야기를 나는 나중에 시녀들 입을 통해 들었다. 하준이 그 조각들을 하나하나 주워 담았다는 얘기도 함께.
'그걸 왜 주워.'
아니, 알 것 같기도 했다. 그거라도 붙잡고 있어야 견딜 수 있었을 테니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도서관 구석에서 책을 읽다가 손에서 그대로 힘이 빠졌다.
'미친놈. 아니, 미친 게 아니라 진짜 기억이 없는 거니까 저 사람 탓은 아닌데.'
그래도 억울했다. 하준이 얼마나 상처받았을지, 나는 상상만으로도 속이 뒤틀렸다.
책장을 몇 번이나 넘기려 했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책을 덮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학원 안에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건 그 무렵부터였다.
강태민이 사고 후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 하준을 아예 남처럼 대한다는 것, 심지어 하준의 이름만 들어도 얼굴을 찌푸린다는 것.
소문은 살이 붙어갔다. 태민이 사실은 다른 인격이 됐다더라, 저주받은 마차였다더라, 심지어는 하준이 뭔가 잘못한 거 아니냐는 얘기까지.
'뭐? 하준이가 뭘 잘못했는데.'
그 대목에서는 진짜 화가 나서 손이 떨렸다.
나는 복도를 걷다가 몇몇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강태민 도련님, 원래 그렇게 열정적이었잖아. 그런데 이제는 아예 딴사람이 됐대."
"저주받은 거 아니야? 마차 사고가 그냥 사고가 아니라던데."
"이하준 도련님도 참 안됐지. 그렇게 좋아했는데."
안됐다는 말이 참 쉽게도 나왔다.
'너네가 뭘 알아.'
나는 그 자리를 지나치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정작 하준의 눈물 한 방울도 본 적 없는 애들이 저렇게 태연하게 씹어대는 게 화가 났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가서 한마디라도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럴 처지도 아니었고 그럴 자격도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잠들지 못하고 창가에 앉아 있었다.
낮에 우연히 마주친 하준의 얼굴이 계속 눈앞에 떠올랐다.
웃지 않는 눈, 그마저도 이제는 웃음 자체를 지어내지 못하는 얼굴. 원래도 하준은 잘 웃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태민 이야기를 할 때는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곤 했다. 그 미세한 온도차를 이제는 볼 수 없게 됐다.
'이대로 두면 하준은 어떻게 될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나는 창밖에서 낯익은 그림자를 보았다.
하준이었다. 늦은 밤, 홀로 정원을 걷고 있는.
그의 발걸음이 이상하게 느렸다. 마치 무언가를 견디는 사람처럼,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달빛도 없는 밤이라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깨가 축 처진 실루엣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
나는 창문을 열까 말까 몇 번이나 손을 뻗다가 다시 접었다.
'지금 나가면 뭐라도 도움이 될까.'
아니,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몰랐다.
그렇게 한참을 지켜보다가, 하준이 정원 한복판, 태민이 자주 앉아 있던 그 벤치 앞에 우두커니 멈춰 서는 걸 보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서 있는 건지 무너져 있는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오래.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불을 걸치고 방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문고리를 잡는 손끝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