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폐하, 그 약속 기록에 있습니다

1화

나는 매일 같은 시각에 눈을 뜬다. 인시 말,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시각이었다. 궁의 하루는 왕비의 기상으로 시작된다고 상궁들은 말했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내가 눈을 뜨는 시각이 곧 하루의 시작이 되도록, 나는 스스로 그 시각을 정해두었다. 왜 그런 습관을 들였는지는 나조차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언젠가부터, 남들보다 먼저 눈을 뜨지 않으면 하루를 놓칠 것 같다는 감각이 있었다. 궁이라는 곳은 그런 곳이었다. 잠시 눈을 감으면 그 틈에 누군가 뭔가를 바꿔놓는 곳. 왕비궁의 아침은 조용했다. 세숫물이 놓이고, 옷이 준비되고, 그 사이 나는 어젯밤 미리 적어둔 종이를 다시 펼쳤다. 종이는 얇았다. 먹은 오래된 냄새를 풍겼다. 나는 그 냄새를 좋아했다. 나는 매일 밤, 그날 있었던 일을 짧게 정리해 적어두는 버릇이 있었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명이 내려졌는지, 그 명이 이전의 명과 어긋나지 않는지. 사관이 기록하는 것과는 다른, 나만의 기록이었다. 사관의 기록은 후대를 위한 것이었다. 내 기록은 오늘을 위한 것이었다. 소영이 세숫물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박소영. 내가 입궁할 때부터 곁을 지킨 시녀장이었다. 나보다 두 살이 많고, 성정이 급했다. 화가 나면 목소리가 먼저 커지는 사람이었다. 반대로 나는 화가 나면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서로의 온도를 재는 사이가 되었다. "마마, 오늘도 벌써 기록을 시작하셨어요?" "습관이잖아." 나는 짧게 답하고 붓을 내려놓았다. "습관이 아니라 걱정이신 거죠." 소영이 대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대야의 물이 살짝 흔들리며 표면에 잔물결이 퍼졌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걱정이라는 말이 맞는지, 아직 나조차 확신하지 못했으니까. 최근 궁 안에는 이상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전하는 요즘 후원 별당에 자주 드나들었다. 낮에는 정무를 보다가도, 해가 지면 슬그머니 걸음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누가 있는지는 이미 궁 안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남작의 딸, 윤아리. 반년 전 궁에 들어온 여인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후원의 잡일을 돕는 나인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전하의 눈길이 그쪽으로 자꾸 향했고, 지금은 배가 불러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이는 단순한 애정사가 아니었다. 궁의 질서는 서열로 이루어진다. 왕비, 후궁, 나인. 그 아래 다시 품계가 나뉜다. 만약 남작의 딸이 회임을 했다면, 그 아이의 자리는 어딘가에 반드시 새겨져야 했다. 그것이 궁의 법이었다. "마마, 어제도 대전 나인이 그러던데요. 전하께서 밤에 별당에서 나오시질 않으셨다고." "들었어." "그런데 그렇게 태연하세요? 저는 속이 다 뒤집히는데." 소영의 손이 대야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나는 소영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분노가 선명했다. 나는 그 분노를 나눠 갖는 대신, 붓을 다시 들었다. "태연한 게 아니라, 아직 확인된 것이 없어서야." "확인이요?" "전하가 무엇을 하시든, 내가 확인하지 못한 것을 근거로 움직이면 그건 나도 그들과 같아지는 거야." 소영은 입을 다물었다. 내 말이 답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궁에 들어온 이후로 단 한 번도 근거 없이 움직인 적이 없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이 자리를 지키는 방식이었다. '소문으로 흔들리면, 그 다음엔 사실로도 흔들리게 돼.' 나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소영에게는 하지 않은 말이었다. 그날도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조회를 마치고, 내명부의 일을 처리했다. 상궁들이 올린 문서를 검토하고, 궁의 재화 출납을 확인했다. 왕비의 일이란 대부분 이런 것이었다. 화려하지 않고, 요란하지 않은, 그러나 어긋나면 궁 전체가 흔들리는 일들. 문서 하나에는 후원 별당의 지출 명세가 적혀 있었다. 평소보다 많은 비단과 약재가 들어갔다는 기록이었다. 나는 그 문서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약재라……' 회임한 여인에게 필요한 물목이었다. 나는 그 항목 옆에 작게 점을 찍어두었다. 확인이 필요하다는 표시였다. 오후 늦게, 나는 다시 어제의 기록을 펼쳤다. 한 달 전, 전하는 정무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명부의 질서는 왕실의 근본이다. 함부로 흔들려서는 안 된다."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 적어두었다. 왕의 말은 곧 법이 되는 자리였고, 그 법이 바뀌기 전에는 지켜져야 했다. 그때 전하의 목소리는 단단했다.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안도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요즘 전하의 걸음은 그 말과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다. 말과 걸음. 법과 행동. 그 둘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 어긋남을 기록해두었다. 아직은 그저 기록이었다. 판단은 아니었다. 판단은 언제나 마지막에 하는 것이었다. 먼저 판단하고 근거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근거를 다 모은 뒤에야 판단하는 것. 그것이 내가 배운 방식이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 무렵,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는 평소보다 빠르고 무거웠다. 누군가 뛰고 있었다. "마마, 대전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문 밖에서 상궁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에도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 나는 붓을 내려놓았다. "들라 하라." 문이 열리고 대전 내관이 들어와 급히 허리를 숙였다.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배어 있었고, 숨이 채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관복 자락이 뛰어온 흔적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전하께오서... 내일 조회에서 중대한 발표를 하시겠다는 전언이십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손끝에 쥔 붓이 조금 떨렸다. "어떤 발표인지 들으셨느냐." 내관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말해보아라. 짐작이라도 좋다." "…신은, 그저 전언만을 받았을 뿐이옵니다." 그 순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이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것을. 방 안의 촛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창밖에서는 바람 한 점 없었는데도. 소영이 내 곁으로 다가와 섰다. 그녀의 시선이 내 손끝, 떨리는 붓끝에 머물러 있었다. "마마……" 나는 붓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종이 위에 작은 먹 얼룩이 떨어졌다. 내관이 물러가고, 방 안에는 나와 소영만이 남았다. 촛불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 불꽃을 바라보며, 내일 아침을 생각했다. 내일 조회. 중대한 발표. 그 두 단어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어떤 발표든, 그것이 후원 별당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확신은 근거 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최근 몇 달간의 기록들이,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조짐들이 이제야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지고 있었다. "마마, 오늘은 일찍 침수 드시는 게……." 소영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기록을 마쳐야 해." 나는 다시 붓을 들었다. 손끝의 떨림은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오늘의 일을 적어내려갔다. 대전 내관이 다녀갔다. 내일 조회에서 중대한 발표가 있을 것이라 하였다.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렇게 적고 나서, 나는 마지막 줄에 작은 글씨를 하나 더 덧붙였다. 불길하다. 붓을 내려놓는 손이 떨렸다. 나는 그 떨림을 애써 감추지 않았다. 감출 이유가 없었다. 소영 앞에서는, 그리고 나 자신 앞에서는. 창밖으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없던 바람이었다. 촛불이 다시 크게 흔들렸다.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까.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