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허당 자객, 위장 황후

4화

마재상 후작은 황후궁의 응접실 한가운데 서서, 은하가 들어서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시선을 창밖에 둔 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넓은 등판과 팽팽하게 당겨진 옷깃의 선만 보아도 이 남자가 평생을 권력의 중심에서 살아온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겨울 햇살이 그의 어깨 위에 얇게 내려앉았지만, 그 빛조차 후작의 서늘한 분위기를 데우지는 못하는 듯했다. 방 안에는 향로에서 흘러나오는 침향 냄새가 은은하게 감돌았고, 그 냄새가 오히려 긴장을 더 짙게 만드는 것 같았다. 은하는 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시녀가 전해 준 후작의 방문 소식을 떠올렸다. '이런 식으로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게, 원래 이 사람 방식인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후작은 곧바로 몸을 돌리지 않았는데, 그 뒷모습에서부터 이미 상대를 압박하려는 계산이 느껴졌다. 은하는 그의 등만 보고도 이 남자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며, 훈련받은 예법대로 조용히 예를 올렸다. 치맛자락이 바닥에 닿는 소리마저 조심스러웠고, 그 작은 소리에도 후작이 반응하듯 어깨를 살짝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황후 마마." 후작이 그제야 몸을 돌리며 첫 마디를 건넸는데, 존칭이었지만 그 목소리에는 존중이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을 은하는 곧바로 느꼈다. 그의 눈빛은 은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듯했고, 그 시선이 마치 물건의 가치를 매기는 상인의 눈길과 닮아 있어서 은하는 속으로 불쾌함을 삼켰다. "폐하 곁에서 지나치게 자유롭게 말씀을 나누셨다 들었습니다." 은하는 그 말이 사흘 전 뜰에서의 대화, 혹은 서재에서의 만남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짐작하며, 궁 안의 눈과 귀가 생각보다 훨씬 촘촘하다는 사실에 속으로 등이 서늘해졌다. '벌써 이렇게까지 알고 있다니.' 은하는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애쓰며, 손끝이 조금 떨리는 것을 소매 속에 감췄다. "신중히 처신하겠습니다." 짧게 대답했지만, 후작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가에 미묘한 주름을 새겼다. "폐하께서는 즉위 이후로 누구에게도 곁을 쉬이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를 마마께서 헤아리셔야 할 것입니다." 후작의 말은 경고이자 동시에 은근한 시험이었는데, 은하는 그것이 자신이 이 자리를 오래 지킬 수 없을 것이라는 암시처럼 들려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후작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의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고,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 듯했다. '폐하 곁에 있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자리인가.' 은하는 그 짧은 문장 속에 숨은 무게를 가늠하며, 애써 담담한 얼굴을 유지했다. 후작이 물러간 뒤, 은하는 응접실에 홀로 앉아 창밖의 정원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는데, 눈 덮인 나무들이 마치 얼어붙은 인형처럼 정지된 채 서 있는 모습이 지금 자신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조금씩 흩어져 내렸지만, 그 나무들은 여전히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저 나무도 나처럼, 여기 서 있으라는 명령을 받은 걸까.' 부질없는 생각이었지만, 그런 상상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 침묵이 견디기 힘들었다. '이 자리에서 살아남으려면, 뭐라도 해야 한다.' 은하는 임무의 실체를 모른 채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판단에, 한태겸에게 다시 서신을 보내기로 마음먹었으나, 그것을 전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황후궁의 출입은 철저히 감시되었고, 시녀들 중 누구를 믿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심지어 매일 방을 청소하러 오는 어린 시녀조차, 그 뒤에 누구의 눈이 붙어 있는지 은하로서는 짐작할 길이 없었다. 결국 은하는 저녁 무렵 이현성이 다시 그녀를 부른 자리에서, 처음으로 스스로 요청을 꺼내 보기로 결심했다. 서재의 문을 넘어서자 익숙한 종이 냄새와 먹 냄새가 코끝을 스쳤고, 이현성은 여느 때처럼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앉아 있었다. 그의 손끝에 굳은살이 보였는데, 그것이 검을 쥔 자의 것인지 붓을 쥔 자의 것인지 은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만만한 손은 아니었다. "폐하." "말하시오." 이현성은 여전히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짧게 답했는데, 그 목소리에는 특별한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은하는 잠시 숨을 삼키고, 준비해 온 말을 꺼냈다. "궁 밖으로, 잠시 나가 볼 수 있을까요." 그 말에 이현성은 서류를 넘기던 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그 시선에 담긴 것이 경계인지 흥미인지 은하로서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잠깐의 침묵이 방 안을 채웠고, 촛불이 흔들리는 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이유는." 짧은 물음에 은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훈련받은 대로 가장 자연스러운 답을 골랐다. "갇혀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요." 그 대답이 지나치게 솔직해서 오히려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이현성은 뜻밖에도 짧게 웃음을 삼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또 이 여자는 이런 식으로 나오는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지금까지 궁에 들어온 여인들 중 누구도 이렇게 대놓고 자유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대부분은 애교를 부리거나, 눈물을 보이거나, 혹은 아예 침묵으로 버텼는데, 이 여자는 그저 사실을 그대로 말하고 있었다. 그 담백함이 오히려 그를 조금 흔들어 놓는 것 같았지만, 이현성은 그 흔들림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호위를 붙이겠소. 대신, 함부로 궁의 경계를 벗어나지는 마시오." 예상보다 쉽게 떨어진 허락에 은하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는데, 그 순간 이현성이 덧붙인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다음번엔 이유를 좀 더 그럴듯하게 준비해 오시오." 그 말에 은하는 얼굴이 조금 붉어지는 것을 느꼈는데, 그것이 부끄러움인지 안도감인지 스스로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지금 이 사람, 나 놀리는 건가.' 은하는 애써 표정을 감추며 고개를 숙였지만, 목덜미까지 슬며시 열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만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얻어낸 작은 자유가, 그녀에게는 임무의 실마리를 다시 쥘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서재를 나서는 발걸음이 처음보다 한결 가벼워졌다는 것을, 은하는 스스로도 이상하게 느꼈다. 다음 날 오후, 은하는 호위 두 명을 대동한 채 궁문을 나섰는데, 오랜만에 맡는 바깥 공기가 살갗에 닿는 순간 온몸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궁 안의 정갈하고 차가운 공기와는 다른, 사람 사는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코끝을 채웠고, 은하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시장의 소란과 사람들의 웃음소리, 떡과 강정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자극했으므로, 은하는 잠시 임무를 잊은 채 그 냄새에 이끌려 걸음을 옮기고 말았다. 좌판마다 늘어선 색색의 옷감과 노점 상인들의 외침, 아이들이 손을 잡고 뛰어다니는 모습까지, 그 모든 풍경이 오랫동안 잊고 지낸 세계처럼 낯설고도 반가웠다. 호위 두 사람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은하의 뒤를 따랐는데, 그들의 발소리는 절도 있게 규칙적이어서 오히려 그 존재가 은하에게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이렇게라도 잠깐 숨을 돌릴 수 있다니.' 은하는 떡집 앞을 지나며 김이 오르는 떡을 잠시 눈으로 좇았지만, 지금 이 순간마저 완전히 즐길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장 어귀를 벗어나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 은하는 자신을 뒤따르는 시선이 호위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낯선 자가 담벼락 뒤에서 은하의 동선을 살피고 있었는데, 그 눈빛은 단순한 구경꾼의 것이 아니었다. 좁은 골목에 들어서자 소음이 갑자기 잦아들었고, 그 정적이 오히려 위태로운 기운을 더 짙게 만드는 것 같았다. 은하는 훈련된 몸이 먼저 반응하듯 걸음을 늦추며, 오른손을 소매 속 단검 자루에 슬며시 가져다 댔다. 그 순간, 낯선 자와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