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허당 자객, 위장 황후

2화

즉위식 다음 날, 은하는 아직 새것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황후궁의 침소에서 눈을 떴다. 천장을 가만히 올려다보는데도 낯선 무늬의 서까래며 금박을 입힌 장식들이 눈에 들어와, 어제까지도 자신이 궁 밖 어딘가의 낡은 여관방에서 웅크려 자던 사람이라는 사실이 실감되지 않았다. 비단 이불의 서늘한 촉감이 손끝에 닿을 때마다 이상하게 낯설어서, 은하는 몇 번이나 손끝으로 그것을 쓸어 보다가 스스로도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걸로 감탄할 처지가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손은 자꾸만 이불자락을 매만졌다. 어젯밤 대전에서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황금색 눈동자, 낮게 깔린 목소리, 그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순간의 서늘한 바닥의 감촉까지도. 그런데 정작 이현성이 그녀에게 더 이상의 말을 건네지 않고 자리로 돌려보낸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보통이라면 안도해야 할 일인데, 그 침묵이 무언가를 가늠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오히려 잠을 설쳤던 것 같기도 했다. '연기만 잘하면 되는 자리일 텐데, 대체 뭘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은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시녀가 가져다준 죽을 몇 술 뜨기 시작했다. 흰 죽 위에 고명으로 얹힌 잣이며 대추가 곱게 놓여 있었지만, 맛을 제대로 느낄 정신도 없었다.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가 삼키고, 다시 뜨고, 그러다가도 자꾸만 생각은 어제의 그 무심한 황금색 눈동자로 돌아갔다. 그러다 갑자기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숟가락을 멈췄다. 복도를 따라 궁인들이 다급하게 오가는 소리가 들렸는데, 발끝이 바닥을 끄는 소리,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 그리고 낮게 억누른 숨소리들이 뒤섞여 있었다. 은하는 훈련된 감각으로 그 발소리들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평범한 아침 업무를 보러 다니는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급박함이 실려 있는, 뭔가를 피하려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는 것 같기도 한 걸음이었다. 무언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낌새였다. 시녀가 "황후 폐하, 아직 나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하며 소매를 붙잡았지만, 궁금함을 이기지 못한 은하는 그 손을 조심스레 떼어내고 회랑으로 나섰다. 발끝에 닿는 회랑의 냉기가 버선 너머로 스며들었고, 아침 공기 속에는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밤의 서늘함이 남아 있었다. 회랑 끝, 정전 앞뜰에는 이미 신하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하나같이 고개를 숙인 채, 감히 눈을 들지 못하는 자세로. 그 가운데 한 사내가 무릎이 꿇린 채 바닥에 처박혀 있는 모습이 보였는데, 관복이 흐트러지고 상투는 반쯤 풀려 있어 이미 얼마나 오래 그 자세로 있었는지를 짐작케 했다. 은하는 기둥 뒤로 몸을 반쯤 숨기며, 저도 모르게 숨을 낮췄다. 이현성은 계단 위에 서서 그 사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어서, 마치 마당에 떨어진 낙엽을 치우라 명령하는 것처럼 무심해 보였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더 소름끼치게 느껴졌는데, 화가 난 얼굴보다 저런 얼굴이 사람을 죽일 때 더 위험한 법이라는 걸 은하는 훈련을 통해 배운 적이 있었다. "세 번의 경고는 이미 지났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뜰 전체에 고요히 퍼졌고, 그 말 한마디에 무릎 꿇린 사내가 온몸을 떨며 바닥에 이마를 짓이겼다. "폐, 폐하…! 신을 굽어 살피시옵소서…!" 사내의 목소리는 갈라져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는데, 그 절박함이 뜰의 냉기를 오히려 더 짙게 만드는 것 같았다. 이현성은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끝으로 옷자락을 한 번 정리했을 뿐인데, 그 작은 몸짓 하나에 신하들 전체가 숨을 죽이는 것이 느껴졌다. 은하는 회랑 기둥 뒤에 몸을 반쯤 숨긴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심장이 조여드는 감각과 동시에 이상하게도 눈을 뗄 수가 없었는데, 자신이 지금까지 봐온 어떤 처형 장면과도 다른 무게감이 있었다. 칼을 들고 싸우는 것도 아니고, 소리를 지르며 저항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한 사람의 목소리 하나로 뜰 전체가 얼어붙어 있는 상황. '이게 황제라는 자리구나.' 은하는 그 생각에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이현성이 손짓하자, 곁에 서 있던 무장한 자가 검을 뽑아 들었다. 쇠가 스치는 소리가 짧게 울렸고, 뜰의 공기가 한층 팽팽해졌다. 그다음 벌어진 일은 순식간이었다. 은하는 자신이 지금까지 훈련받은 그 어떤 살상 장면보다도 이 장면이 더 서늘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칼끝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 짧은 신음, 그리고 뒤이은 무거운 침묵. 피 냄새가 뜰 전체에 퍼지는 데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철 냄새와 흙냄새가 뒤섞인 그 냄새가 회랑까지 스며들어, 은하는 코끝을 찌르는 그 비릿함에 저도 모르게 숨을 얕게 쉬었다. 신하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인 채 그 냄새를 견디고 있었는데, 그중 누구 하나 놀란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다들 이런 일에 익숙한 건가.' 은하는 그 무표정한 얼굴들을 보며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현성은 죽은 자를 향해 잠시 시선을 던졌다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몸을 돌려 계단을 올랐다. 그의 발걸음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고, 방금 사람 하나가 목숨을 잃은 뜰을 걷는 것 같지 않게 평온했다. 그 순간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회랑 기둥 뒤의 은하를 스치듯 지나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는데, 은하는 그 짧은 눈맞춤에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봤구나.' 그가 자신을 봤다는 확신이 드는 동시에, 은하는 도망치듯 몸을 돌리려 했지만 다리가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발끝부터 시작된 그 마비 같은 감각이 무릎까지 타고 올라와서, 은하는 그 자리에 뿌리박힌 나무처럼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잡혀가는 건가.' 목격자를 살려두지 않는 게 궁의 관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이현성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은하가 있는 회랑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신하들은 그 움직임 하나에도 저마다 숨을 죽였는데, 몇몇은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그저 곁눈으로만 상황을 살피는 듯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잠시 침묵했으므로, 은하는 그 침묵이 어떤 심판의 전조인지 가늠할 수 없어 손끝이 떨리는 것을 애써 감췄다. 그의 옷자락에서도 어렴풋이 피 냄새가 배어 있는 것 같았고, 그 냄새가 코끝에 와닿는 거리까지 그가 다가와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났다. "놀랐소?" 짧은 물음이었지만 은하는 그 속에서 시험 같은 것이 섞여 있다는 걸 느꼈다.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으나, 그 담담함 자체가 오히려 무게를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목이 붙어 있을까.' 은하는 자신이 지금 어떤 대답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 빠르게 계산해야 했다. 황후답게 담담한 척을 해야 하나, 아니면 놀란 시늉이라도 해야 하나, 그 짧은 순간에도 머릿속으로 몇 가지 대답을 떠올렸다가 지웠다가 했다. 정작 입에서 나온 말은 계산과는 조금 다른 방향이었다. "…피 냄새가, 좀 독하네요." 그 말에 이현성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것이 불쾌함인지 흥미인지 은하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는데, 순간 자신이 뭔가 크게 잘못 말했다는 생각에 손끝이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죽은 목숨이다.' 그런 극단적인 결론까지 머릿속에 스쳤을 무렵, 이현성은 짧게 침묵을 지켰다가 이내 옷자락을 정리하며 시선을 거두었다. 이현성으로서는 그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인지,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한 기색이 스쳤다. 보통이라면 겁에 질려 고개를 조아리거나, 혹은 애써 담대한 척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 애쓰는 반응을 예상했을 텐데, 정작 나온 말은 냄새가 독하다는 지극히 감각적인 지적이었다. 그것이 두려움 없는 대담함인지, 아니면 그저 생각 없이 튀어나온 본능적인 말인지 그로서도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 무심한 반응 뒤로 신하들의 눈초리가 일제히 은하에게 쏠렸다. 그중 한 노신의 시선이 유난히 매섭게 그녀를 훑고 있었는데, 그 시선에는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무게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마재상 후작이었다. 그는 황후궁 쪽으로 사라지는 이현성의 뒷모습과 여전히 넋이 나간 은하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입가에 미묘한 주름을 새겼다. 마치 무언가를 가늠하려는 듯, 혹은 이미 어떤 결론을 내린 듯한 표정이었다. 은하는 그 시선의 무게를 미처 다 헤아리기도 전에, 시녀들의 손에 붙들려 다시 궁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야 했다. 회랑을 지나 침소로 돌아가는 발걸음 내내, 은하는 등 뒤로 느껴지는 그 노신의 시선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경계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향한 계산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앞으로의 궁 생활이 결코 순탄치 않을 것 같다는 예감만은 확실하게 마음에 눌러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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