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강태민은 서재의 창가에 서서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의 시선은 나뭇가지 사이로 부서지는 오후의 빛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 눈빛 안에는 지금 이 순간과는 전혀 무관한 오래된 기억이 고여 있었다. 정원의 라일락 나무는 벌써 꽃을 다 떨구고 초록의 잎으로만 무성했으나, 그의 눈에는 그 나무조차도 낯설게 비쳤다. 마치 자신이 서 있는 이 자리가 현재가 아니라, 시간의 어느 갈피에 끼어든 낡은 종이 한 장처럼 느껴지는 탓이었다.
공작가에서 혼담을 수락했다는 서신이 도착한 지 사흘째였다. 그는 그것을 받아 든 순간에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고, 곁에서 지켜보던 집사조차 자작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 없어 조심스레 물었을 정도였다. 서신을 개봉하던 그의 손끝은 흔들림이 없었으나, 종이를 접어 서랍에 넣는 손길만큼은 유독 느렸다. 그 느림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오랫동안 그를 모셔온 집사조차 읽어내지 못했다.
"정말 이대로 진행하실 겁니까, 자작님. 상대는 공작가입니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면..." 집사는 말끝을 흐리며 자작의 안색을 살폈다.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조심스러움이 뒤섞여 있었으나, 그 아래에는 오랜 세월 이 가문의 흥망을 지켜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진짜 두려움이 배어 있었다.
"도윤이 원한 일이다." 강태민은 짧게 답했을 뿐, 더 이상의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
집사는 잠시 더 머물러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서재를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유난히 조용했는데, 그 정적이 오히려 방 안의 공기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집사가 물러난 뒤, 그는 홀로 서재에 앉아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아직 젊었던 시절, 지금의 자작위조차 없었던 때의 일이었다. 당시 그의 영지는 인근 백작가의 사냥터 확장 계획에 휘말려 절반 가까운 땅을 빼앗길 위기에 놓여 있었고, 항의하러 갔던 그의 형이 그 백작의 사병들에게 붙잡혀 매질을 당한 채 실려 왔던 밤을 그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밤은 유독 달빛이 없었다. 마당에 내걸린 등불조차 바람에 흔들려 빛을 제대로 밝히지 못했고, 그 어둠 속에서 형의 몸을 가마니에 실어 나르던 사람들의 발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사흘을 앓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그 뒤로 백작가는 단 한 마디의 사과도 없이 사냥터를 확장했다. 강태민은 그 부당함을 어디에도 호소할 수 없었다. 그가 호소할 만한 힘이 그에게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그는 어린 도윤을 품에 안고 밤새 떨었다. 아이의 작은 몸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오히려 그의 두려움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는데, 그는 그 온기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권력이란 것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짓밟을 수 있는지, 그는 그날 뼈에 새기듯 배웠고, 그 뒤로 다시는 권력에 맞서지 않기로 스스로 다짐했었다.
그러니 이 혼담도 마찬가지였다. 아들이 자청했다는 이유만으로 순순히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상대가 공작가라는 사실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이 처음부터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도윤이 원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 혼담을 막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들이 스스로 청한 일이라면, 그것은 이미 강태민이 거스를 수 있는 흐름이 아니었다.
하지만.
강태민은 창밖의 빛이 서서히 붉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도윤이 열 살 때부터 상단 일을 시작해 지금의 청람상회를 일으키기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아들에게 그 길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아들은 언제나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움직였으며, 그 판단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
처음 도윤이 상단을 열겠다고 말했을 때, 강태민은 그것을 어린아이의 치기로 여겨 만류했었다. 하지만 아들의 눈빛에는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단단함이 있었고, 결국 그는 반대를 접었다. 그리고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청람상회는 인근 상권을 아우르는 이름이 되었으며, 그 성과 앞에서 강태민은 아들을 더 이상 어린아이로 보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어느 순간부터는, 아들이 자신보다 더 멀리, 더 정확하게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래서 이번 혼담 역시, 도윤이 무언가를 보고 결심한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단순한 명예욕이나 가문의 위세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그 아이만이 알고 있는 어떤 계산이 그 뒤에 숨어 있으리라는 것을, 강태민은 오랜 세월 아들을 지켜보며 배운 직감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서재 문이 조용히 열리는 소리에 강태민은 고개를 돌렸다. 도윤이었다. 열여섯 소년의 몸을 하고 있었으나, 그 눈빛만큼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깊이를 담고 있어서, 강태민은 종종 아들을 바라볼 때마다 낯선 위압감을 느꼈다. 걸음걸이마저도 소년답지 않게 정갈했는데, 그것은 마치 이미 세상의 셈법을 다 익힌 자가 걷는 걸음처럼 보였다.
"공작가에서 답신이 왔다." 강태민이 서류를 책상 위로 밀어 놓으며 말했다. "네가 원한 대로 되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도윤은 담담하게 서류를 받아 들었으나, 그 손끝이 잠시 서류의 표지를 어루만지는 모습에서 강태민은 아들의 안도를 읽어냈다. 그 짧은 순간의 손짓은 도윤이 평소 드러내지 않는 감정의 파편이었고, 강태민은 그 파편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묻지 않으마." 강태민은 아들의 얼굴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다만 하나만 알아두어라. 공작가는 우리 같은 가문을 언제든 짓밟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 앞에서는 아무리 옳은 말도 힘없이 흩어질 수 있음을."
도윤은 잠시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압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를 겁니다."
그 말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으나, 강태민은 그것이 젊은 혈기에서 나온 오만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아들의 눈빛 속에는 언제나 계산과 확신이 함께 있었고, 그것이 지금까지 그를 실패하지 않게 만든 원천이었으니까. 강태민은 잠시 그 눈빛을 마주하며, 그 안에 담긴 것이 단순한 자신감이 아니라 이미 결과를 예측하고 그 길을 걷고 있는 자의 여유임을 알아차렸다.
"어떤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는 게냐." 강태민이 낮게 물었다. 목소리에는 아버지로서의 걱정과, 그 걱정을 넘어선 궁금증이 함께 묻어 있었다.
"근거는 아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도윤은 담담히 대답했다. "다만 이 혼사가 성사되면, 청람상회도, 이 가문도 지금과는 전혀 다른 자리에 서게 될 겁니다."
강태민은 그 말을 곱씹으며 잠시 침묵했다. 아들의 말은 언제나 절제되어 있었고, 그 절제 아래에는 이미 계산이 끝난 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을 알기에 강태민은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했다.
"그래." 강태민은 짧게 대답하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여라. 나는 이미 오래전에, 힘 있는 자들에게 맞서는 대신 살아남는 법을 배웠으니."
그의 목소리에는 옛 상처의 흔적이 묻어 있었으나, 도윤은 그것을 굳이 캐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서류를 품에 안은 채 조용히 서재를 나섰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강태민의 눈빛에는 오래전 밤새 떨며 안았던 어린 아들의 모습과, 지금 눈앞의 청년이 겹쳐 보였다.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복도를 따라 멀어지는 동안, 강태민은 다시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로 정원의 나무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고, 그 그림자는 마치 오래전 그날 밤의 어둠을 연상시켰다. 그는 문득 자신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애써 다잡으며 손끝을 책상 모서리에 가만히 얹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강태민은 문득 알 수 없는 불안이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는 것을 느꼈다. 공작가와의 혼사가 단순히 도윤의 성공을 증명하는 자리가 아니라, 어쩌면 그 옛날 자신이 겪었던 짓밟힘의 기억을 다시 마주하게 될 자리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었다. 그 예감은 확신이 되지 못한 채로, 그의 가슴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자리를 넓혀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