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고블린 영애와 결혼합니다

1화

선우공작가의 응접실은 대낮에도 서늘한 냉기가 감돌았는데, 그것은 창을 가린 짙은 벨벳 커튼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안에 앉은 사내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벽에 걸린 촛대의 불빛조차 이 방에서는 힘을 잃어, 황금빛이 아니라 흐릿한 재빛으로 가라앉아 있는 듯했다. 선우태호는 팔걸이에 팔을 얹은 채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고,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시종은 이마에 맺힌 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감히 손을 들어 닦지 못했다. 방 안에는 시계 소리만이 살아 움직였다. 째깍째깍,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그 소리가 오히려 정적의 무게를 더 짙게 만들었는데, 시종은 그 소리를 세는 것으로 겨우 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다시 말해보아라." 공작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그 안에 서린 냉기가 방 안의 온도를 몇 도쯤 떨어뜨리는 듯했다. "이번이 몇 번째냐." "여, 여섯 번째입니다, 공작님." 시종은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을 스스로도 느끼며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백작가에서도, 후작가에서도... 모두 혼담이 오간 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파기되었습니다." 여섯 번. 그 숫자가 공작의 귓가에 맴돌며 지난 몇 년의 기억을 하나씩 끌어올렸다. 첫 번째는 백작의 삼남이었고, 두 번째는 후작가의 방계였으며, 세 번째는... 이제는 그 얼굴들조차 흐릿하게 뭉개져 하나의 형체로만 남아 있었다. 모두가 같은 표정을 지었지. 처음에는 기대에 부풀어 찾아왔다가, 딸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낯빛이 하얗게 질려 뒷걸음질치던 그 표정들이. 선우태호는 손끝으로 팔걸이를 천천히 두드렸는데, 그 규칙적인 소리가 오히려 방 안의 정적을 더 무겁게 짓눌렀다. 그는 딸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지만, 이지선이 낳아준 하나뿐인 자식의 얼룩진 피부와 그 위로 돋아난 무수한 혹들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턱이 단단하게 조여지며 이가 갈리는 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다. 내 핏줄에 어찌 그런 흉한 것이 섞여 나온단 말인가. 그 생각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멈추었다. 이지선의 가문도, 자신의 가문도 대대로 흠 없는 미모로 이름을 떨쳐온 명문가였으니, 서은의 그 몰골은 필경 저주가 아니고서야 설명될 도리가 없었다. 하나 저주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소문이 퍼지는 순간, 공작가는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었다. "이번 파기의 이유는." "그, 그것이..." 시종은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눈을 굴렸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그는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을 맞잡아 애써 감추었다. "말하라." 짧고 낮은 명령이었으나 거역할 수 없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상대 측 자제가 아가씨를 직접 뵙고... 놀라 그 자리에서 파혼을 선언했다고 합니다." 선우태호의 눈빛이 순간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 얘기를 듣는 것이 처음이 아니었으나, 매번 처음 듣는 것처럼 명치 밑에서 뜨거운 것이 치솟았다. 마치 오래된 상처를 매번 같은 자리에서 다시 찢어내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감히. 내 딸을 그리 취급하다니. 그 상대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았으나, 그의 얼굴에 스쳤을 경멸의 표정만은 선명하게 그려졌다. 놀라움과 혐오가 뒤섞인, 마치 흉물을 마주한 듯한 그 표정을. 하지만 곧 그 분노는 스스로에게로도 향했는데, 서은의 외모가 자신과 이지선의 혈통에서 온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저주 같은 것이었음을 알면서도, 그 사실이 세상에 알려질 때마다 공작가의 위엄에 흠집이 생긴다는 것을 그는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딸을 향한 애정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이름에 그늘이 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데서 오는 노여움이었다. "그럼 이번에 새로 들어온 혼담은." 그는 화제를 돌리듯 말했으나,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시종은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조심스레 서류 한 장을 두 손으로 받쳐 올렸다. 종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조차 이 방에서는 크게 울리는 듯했다. "강자작가의 사남, 강도윤이라는 자입니다." "강자작가?" 선우태호는 그 이름을 처음 듣는 듯 미간을 좁혔다. "들어본 적 없는 가문이군." "본래는 지방의 작은 자작령이었으나, 최근 몇 년 사이 사남이 세운 청람상회가 급성장하여 국내 준대형 상회로 자리잡았다고 들었습니다. 그 재력을 바탕으로 근래 사교계에서도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상인 가문이라는 뜻이군." 선우태호의 입가에 비웃음이 스쳤다가 곧 사라졌다. 그의 눈에 상인이란 언제나 필요할 때 돈을 빌려주고 필요할 때 이용하는 도구에 불과했고, 그런 자의 아들이 공작가의 사위 자리를 넘본다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로 느껴졌다. "돈으로 신분을 사려는 속셈이겠지." 그는 혼잣말처럼 덧붙였는데, 그 말투에는 오랜 세월 상인들을 내려다보아온 귀족의 습관적인 경멸이 배어 있었다. "그런 자들이야 늘 그런 식이지 않던가. 돈은 있으나 이름이 없으니, 이름을 사려드는 것이지." "그런데 어찌 이 혼담이 올라온 것이냐. 우리 쪽에서 먼저 제안한 것은 아닐 텐데." 시종은 다시 한번 침을 삼켰다. 이 대답이 공작을 얼마나 자극할지 알고 있었기에, 그는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끼며, 그는 최대한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것이... 강자작가의 사남이, 그 강도윤이라는 자가 직접 이 혼사를 자청했다고 합니다." 방 안의 정적이 순간 살아 있는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선우태호는 팔걸이를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추었고, 그 침묵이 오히려 시종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시계 소리마저 그 순간만은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자청했다." 공작은 그 말을 곱씹듯 되뇌었다. "상인의 아들이, 감히 내 딸에게 먼저 청혼을 넣었단 말이냐." "예, 예. 아가씨의 얼굴을 직접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오직 혼담만으로 성사를 청했다고 합니다." 선우태호의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지나갔다. 처음에는 분노였으나, 곧 그 아래에서 낯선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보지도 않고. 대체 무슨 속셈으로. 여섯 번의 파혼이 모두 딸의 얼굴을 마주한 뒤에 벌어진 일이었으니, 얼굴을 보지 않고 청혼을 넣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기이한 일이었다. 상인의 자식이라면 더더욱 실리를 따지는 법일 텐데, 실물도 보지 않은 신부에게 이토록 서둘러 매달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공작가의 이름값을 노린 것이라면 흔한 일이었으나, 이지선의 딸이라는 것을, 그 얼룩진 피부를 이미 소문으로 들었을 것임에도 물러서지 않았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 동작이 마치 겨울잠에서 깨어난 짐승처럼 느릿하고 무거웠는데, 시종은 그 기척만으로도 온몸이 굳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공작이 창가로 걸어가는 동안 그의 발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고, 오직 벨벳 커튼 자락이 스치는 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다. 창밖으로는 저물어가는 오후의 빛이 정원의 나무들 위로 내리고 있었으나, 선우태호의 눈에는 그 풍경이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그는 한동안 등을 돌린 채 서 있었고, 시종은 그 뒷모습에서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 자를 조사해라." 공작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상인 가문의 아들이 무슨 꿍꿍이로 내 딸을 원하는지, 뿌리부터 캐내어 오라. 그가 태어난 날부터 지금까지, 어느 골목을 지나다녔는지까지도 빠짐없이 파악해." "명심하겠습니다, 공작님." "청람상회의 자금이 어디서 흘러들어왔는지도 함께 살펴라. 그런 자들이 갑자기 재력을 불렸다는 것은, 뒤가 깨끗하지 않다는 뜻일 수도 있으니." 시종이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나려는 순간, 선우태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으나, 그 안에 담긴 냉기는 방금 전보다 한층 더 깊어져 있었다. "만약 그 속에 조금이라도 불순한 의도가 있다면." 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으나, 방 안을 가득 채운 냉기가 그 뒤에 이어질 말을 대신 웅변하고 있었다. 시종은 그 미완의 문장이 무엇을 뜻하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이 방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자라면, 공작이 끝맺지 않은 말이야말로 가장 무거운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시종이 조심스레 물러난 뒤에도, 선우태호는 여전히 창가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손끝이 다시 팔걸이 대신 창틀을 천천히 두드리기 시작했는데, 그 소리는 마치 무언가를 가늠하는 것처럼 느리고 조심스러웠다. 얼굴도 보지 않고 청혼을 넣은 사내라니. 그런 자가 대체 무슨 패를 숨기고 있는 것일까. 선우태호의 입가에 다시 한번 옅은 비웃음이 스쳤다가, 이번에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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