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밤이 깊었다.
유이슬은 잠들지 못했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몸을 뒤척였다. 눈을 감아도 잠은 오지 않았다.
작은 방 안, 창틀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에서 익숙한 냄새가 났다.
향초 냄새.
마른 약초 냄새.
오래된 나무 냄새.
이 방에서 매일 밤 맡던 냄새들이었다. 낮 동안 왕비의 침전을 오가며 몸에 밴 약재 냄새, 저녁마다 태워두는 향초의 은은한 향, 그리고 십 년도 더 된 방의 마루판에서 스며 나오는 나무 냄새. 익숙해서 오히려 안심이 되는 냄새들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로 다른 냄새가 섞여 들었다.
타는 냄새였다.
살이 타는 냄새는 아니었다. 나무나 옷감이 타는 냄새도 아니었다.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냄새였다. 형체 없는 열기가, 마치 뿌리를 내리고 있던 무언가가 뽑혀 나가며 남긴 흔적처럼 코끝을 스쳤다.
유이슬은 코를 찡그렸다. 다시 냄새를 맡았다. 분명했다.
가슴 한가운데가 뜨거워졌다.
처음에는 미열 같았다. 곧 그것은 불씨처럼 번져 갔다. 심장 아래쪽, 아무도 손댈 수 없는 곳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걷어냈다. 맨발이 차가운 마루에 닿았다. 그 서늘함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몸은 뜨거운데 발밑은 얼어 있는 이 감각이, 마치 두 개의 다른 세계에 동시에 서 있는 듯했다.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손바닥 안쪽에서 옅은 빛이 맺혀 있었다. 은은한 결이 물결처럼 번져나갔다. 처음엔 희미했다가, 점점 또렷해졌다. 마치 물속에 떨어진 잉크 한 방울이 퍼지는 것처럼, 손금을 따라 빛의 무늬가 흘렀다.
점. 선. 물결. 탑.
낯익은 문양들이 손바닥 위에서 어른거렸다.
웅—
귓속에서 낮은 울림이 지나갔다. 처음 느끼는 감각은 아니었다. 언젠가 한 번, 아주 오래전에도 이런 울림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손끝이 저렸다. 그때도 지금처럼 가슴 한가운데가 이렇게 뜨거워졌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그날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느낌만이 남아 있었다. 잃어버린 것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채로.
그녀는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열자 밤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차가웠다.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궁의 담장 너머, 왕비의 침전이 있는 방향에서 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평소보다 많은 등이 켜져 있었다. 하나, 둘, 셋. 세어보려 했지만 불빛은 흔들리며 움직여서 정확히 셀 수가 없었다. 마치 그 안에서 여러 사람이 등을 들고 이리저리 오가는 것처럼 보였다.
무언가 벌어지고 있었다.
유이슬은 창틀을 붙잡았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나가야 하는지, 기다려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왕비의 병을 돌본 것은 자신이었다. 열흘 전까지만 해도 사경을 헤매던 왕비를 치유한 것도 자신이었다. 만약 저 불빛이 왕비와 관련된 것이라면, 자신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밤중에 함부로 침전에 다가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성녀라는 이름으로 궁에 들어와 있다 해도, 그 이름이 모든 곳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통행증은 아니었다.
그녀는 창턱에 이마를 댔다. 차가운 나무의 감촉이 이마에 닿았다. 가슴의 열감은 조금도 잦아들지 않았다.
같은 시간, 궁 밖 고아들의 숙소에서는 강도현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가슴이 뜨거웠다. 손끝이 저렸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이슬이가 위험할 때, 이슬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항상 이렇게 느껴졌다.
숙소는 어두웠다. 옆에서 자던 아이들의 숨소리가 고르게 들렸다. 도현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무 빛도 없었다. 그런데도 가슴속의 열감은 진짜였다. 몸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발이 이불을 걷어차는 소리에 옆에서 자던 아이 하나가 뒤척였다.
"형, 왜 그래……"
잠에 취한 목소리였다.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옷을 걸치지도 않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맨발에 닿는 흙바닥의 냉기가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발밑에서 자갈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발바닥이 까져도 상관없었다.
궁의 담장이 저 앞에 보였다. 그는 달렸다. 팔을 크게 휘두르며, 다리에 힘을 실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이슬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까지 손끝이 저릴 리 없었다. 이 감각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궁의 외벽이 눈앞에 다가왔다. 담장은 높았다. 평소라면 감히 넘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높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왕비의 침전 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러 목소리가 뒤섞여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안에 다급함이 배어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느껴졌다. 등불이 어지럽게 오갔다. 그림자들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때, 침전 안쪽 담장 위로 옅은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방금 자신이 느낀 그 감각과 같은 결의 빛이었다. 은은하고, 물결처럼 흔들리는, 유이슬 특유의 빛.
도현의 눈이 커졌다.
'이슬이가 저기 있다.'
그렇게 확신했다. 확신이 아니라 그저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도현은 담을 넘었다.
손끝에 돌의 차가움이 닿았다. 돌 틈에 발끝을 걸치고 몸을 끌어 올렸다. 무릎이 담벼락에 부딪혔다. 통증이 스쳤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뛰어내리고 몸을 낮췄다.
착지하는 순간, 발바닥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잠시 숨을 죽이고 주위를 살폈다. 정원의 나무들이 어둠 속에서 검은 실루엣으로 서 있었다. 저 멀리 침전의 창문에서 불빛이 흘러나왔다.
정원을 가로질러 침전 가까이 다가갔을 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서라."
도현의 몸이 굳었다.
창끝이 그의 등을 겨누고 있었다. 차가운 금속의 기운이 등을 통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수상한 놈이다. 잡아라."
목소리가 또렷하게 명령을 내렸다.
도현은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이미 세 명의 경비병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사방이 막혔다. 도망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저는, 저는 그냥 여기……"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비병 하나가 그의 팔을 잡아챘다. 팔이 뒤로 꺾였다. 어깨 관절에서 뻐근한 통증이 올라왔다. 바닥에 무릎이 짓눌렸다. 흙바닥의 냉기가 무릎을 파고들었다.
"저는, 저는 그냥—"
말은 끝나지 못했다. 입에 재갈 같은 천이 물렸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도현은 눈을 크게 뜨고 침전 쪽을 바라보려 했지만, 경비병들이 그를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그는 끌려갔다.
발이 땅에 질질 끌렸다. 몸부림쳤지만 세 명의 힘을 이겨낼 수 없었다. 그의 눈에 마지막으로 담긴 것은 침전의 창문에서 흘러나오던 옅은 불빛이었다. 그 불빛이 점점 멀어져 갔다.
그날 밤, 강도현이라는 소년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왕비 서혜원의 침전 안에서는 그보다 조금 앞서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의녀가 왕비의 손목을 짚었다. 맥을 짚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손을 떼며 낮게 신음했다.
"숨이…… 없습니다."
침전 안의 등불이 일제히 흔들렸다. 마치 바람이 방 안을 훑고 지나간 듯했다.
시중을 들던 상궁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누군가는 손으로 입을 가렸고, 누군가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왕비는 열흘 전까지만 해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앓아누워 있었다. 밤낮으로 열이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했고, 태의들도 손을 쓸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런 상태가 달포 가까이 이어지면서, 침전 안에서는 이미 최악의 상황을 각오하는 목소리도 나오던 참이었다.
그러던 왕비를 유이슬이 치유했다. 그날 이후로는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고, 스스로 일어나 앉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는 소문이 궁 안에 퍼져 있었다. 상궁들 사이에서는 성녀가 내린 은혜라는 말까지 돌았다. 그런데 단 하루 사이에, 아무 조짐도 없이 숨이 끊어진 것이었다.
의녀는 다시 왕비의 손목을 짚었다. 다시. 그리고 또 한 번. 손끝에 아무런 박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얼굴은 평온했다. 잠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가슴은 더 이상 오르내리지 않았다.
"마마…… 마마."
상궁 하나가 왕비의 어깨를 흔들었다. 대답은 없었다.
침전 안이 삽시간에 혼란에 빠졌다. 등불을 든 궁녀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문밖에 서 있던 병사들이 무슨 일이냐고 소리쳤다.
상궁 하나가 다급히 외쳤다.
"태자 전하께 알려라. 어서!"
다른 상궁이 문을 박차고 나갔다. 복도를 달리는 발소리가 침전 밖까지 울려 퍼졌다.
"어의를 불러라! 어의는 어디 있느냐!"
또 다른 목소리가 겹쳐졌다. 등불이 어지럽게 흔들리며 창밖으로 그 빛이 새어 나갔다. 도현이 담장 밖에서 본 바로 그 불빛이었다.
그 시각, 유이슬은 여전히 창가에 서 있었다. 손바닥의 빛은 서서히 잦아들었지만, 가슴의 열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 두근거림이 단순한 불안 때문인지, 아니면 몸속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뒤틀리고 있기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이건 그저 우연히 느껴진 감각이 아니었다. 도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동시에, 저 침전에서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두 가지 예감이 동시에 그녀를 짓눌렀다.
한쪽은 도현이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소년. 언제나 자신의 위기를 먼저 알아차리고 달려와 주던 존재였다. 다른 한쪽은 왕비였다. 자신이 며칠 전까지 정성을 다해 치유했던 사람이었다.
두 예감 중 어느 것도 놓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방 안에 갇힌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창밖을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침전 쪽 불빛은 점점 더 많아졌다. 이제는 등불의 개수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사람들의 목소리도 점점 커졌다. 무언가 큰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유이슬은 창틀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손톱이 나무에 파고들었다.
새벽이 오기 전,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여러 사람의 발소리였다. 무거운 발소리였다. 한 사람의 발소리가 아니었다. 최소한 네다섯 명이 함께 걷는 발소리였다. 그 발소리에는 특유의 규칙이 있었다. 갑주를 걸친 병사들의 발소리, 절도 있게 맞춰진 걸음.
유이슬의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기운이 스쳐 올라갔다.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이 오히려 더 무겁게 느껴졌다.
문이 벌컥 열렸다.
갑주를 입은 병사들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등불을 든 병사가 앞장서고, 그 뒤로 창을 든 병사들이 따라 들어왔다. 그들의 눈에는 두려움과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 성녀라 불리는 이의 방에 들어서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인 듯했다.
앞장선 병사가 낮게 말했다. 목소리에 억지로 힘을 주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유이슬. 왕비 마마의 죽음에 관해 국법의 문초를 받으라는 명이 내렸다."
유이슬은 숨을 멈췄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방금까지 손바닥에 맺혀 있던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냉기가 퍼져 나갔다.
"왕비 마마께서…… 돌아가셨습니까."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도 그 떨림을 억누를 수 없었다.
대답은 없었다. 병사들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두 손이 그녀의 양쪽 어깨를 짓눌렀다.
"놓아주십시오. 저는—"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병사들의 손은 단호했다. 그들의 손에 실린 힘은 조금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았다.
유이슬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향초의 흔적. 마른 약초 다발이 걸린 벽.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나던 마루. 이 모든 것이 갑자기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창밖으로, 아직 지지 않은 새벽별 하나가 흔들리듯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끌려나갔다.
발이 문지방에 걸려 몸이 크게 휘청였다. 병사 하나가 그녀의 팔을 더욱 세게 붙잡았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궁녀들의 눈길이 그녀를 향했다. 놀람과 의심, 그리고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뒤섞인 눈빛들이었다.
그것이 그날 밤, 성녀 유이슬이 마지막으로 본 자신의 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