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다과회는 예상보다 훨씬 까다로운 자리였다. 새하얀 테이블보 위에 놓인 도자기 잔들은 저마다 손잡이의 방향이 미묘하게 다르게 세팅되어 있었고, 서린은 그 규칙을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왼쪽으로 잡아야 하는지 오른쪽으로 잡아야 하는지, 새끼손가락을 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그 모든 것이 시험처럼 느껴져서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첫 잔에서는 손잡이를 반대로 잡아 옆자리 영애의 눈썹이 살짝 올라가는 걸 보았고, 두 번째 잔에서는 접시를 무릎이 아니라 테이블 위에 그대로 두어 시녀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서린은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맙소사, 게임에서는 이런 게 튜토리얼로도 안 나왔잖아…….
세 번째 잔에서야 겨우 제대로 잡는 법을 익혔는데, 그마저도 도윤이 옆에서 나직하게 알려주지 않았다면 진작 웃음거리가 되었을 터였다.
"찻잔은 손잡이를 이렇게, 그리고 접시는 무릎 위에……" 도윤이 조용히 시범을 보이며 설명해주는 사이, 서린은 그의 손동작을 곁눈질했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찻잔의 손잡이를 살짝 감싸는 모습이 마치 조각한 듯 정물화처럼 정갈했고, 그 손끝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니 문득 이상한 기시감이 스쳤다. 게임 화면 속에서는 이런 사소한 배려 장면이 대사 몇 줄로 압축되어 지나갔을 텐데, 실제로 마주하니 그 다정함이 훨씬 무겁게, 그리고 훨씬 낯설게 다가왔다.
"고, 고마워요." 서린이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자, 도윤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미소가 잔잔한 호수에 돌 하나 던진 것처럼 은은하게 퍼졌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 담백한 대답에 서린은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손끝이 조금 저릿한 건 아마 긴장이 풀려서일 거라고, 서린은 스스로 되뇌었다.
다과회가 끝난 뒤, 서린은 발목 상태를 재확인하러 다시 의무실을 찾았다. 사실 발목은 이미 다 나은 것 같았지만, 혹시 몰라서, 라는 핑계로 걸음을 옮긴 것이었다. 문을 열자 윤재는 소파에 늘어져 있다가 서린을 보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어, 또 왔네. 발목 아파?" "아, 아뇨, 그냥 확인차……" 서린이 머뭇거리며 말하자, 윤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어차피 왔으니까 맥 좀 짚어보자." 손끝이 서린의 손목에 닿는 순간, 서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는데, 윤재의 눈동자가 뜻밖에도 무언가를 살피듯 진지하게 가늘어졌기 때문이었다. 평소의 능글맞은 표정은 사라지고, 검진하는 의사처럼 냉정한 얼굴이 잠시 스쳤다.
"마력 흐름이 좀 불안정하네. 요즘 스트레스 받는 일 있어?" "그, 그런 거 아닌데요……." 서린이 손을 슬쩍 빼내려 했지만, 윤재는 잠시 더 붙잡고 있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손을 놓았다.
"흠, 마력 조절 수업은 열심히 들어야 할 것 같은데." 그 말에 서린은 속으로 뜨끔했다. 마력 조절 실패가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이건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경고였다. 원작 설정에서 여주인공이 폭주한 마력에 휩쓸려 목숨을 잃는 장면을 떠올리자, 서린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저, 저 진짜 열심히 할게요……." 서린이 다짐하듯 중얼거리자, 윤재는 픽 웃으며 소파에 다시 몸을 던졌다. "말은 저렇게 하고 또 딴짓하겠지." "안 해요!" 서린이 항변했지만, 윤재의 눈빛에는 여전히 걱정과 장난기가 반쯤씩 섞여 있었다.
다음 날 마법 수업 시간, 서린은 실습장 한가운데서 지팡이를 들고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교수가 시범을 보인 대로 마력을 응축시켜 작은 불꽃을 만들어내는 초급 마법이었는데, 서린의 지팡이 끝에서는 불꽃 대신 검은 연기만 뿜어져 나왔다. 한 번, 두 번, 세 번을 시도해도 매번 같은 결과였다. "어, 어……." 주변 학생들이 슬쩍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고, 서린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이렇게 못할 거면 차라리 마력 자체가 없는 게 나았을 텐데, 라는 자조적인 생각이 스쳤다.
"마력량은 반에서 제일 높은데, 조절이 전혀 안 되는군요." 교수가 무심하게 던진 평가에 서린은 자존심이 상하기보다는 오히려 안도했다. 이 정도 평가는 원작 설정과 딱 맞아떨어졌으니, 죽음의 시나리오를 벗어나려면 오히려 이걸 고쳐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최소한 방향은 맞게 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실습이 끝난 뒤, 다른 학생들이 하나둘 실습장을 빠져나가는 와중에도 서린은 홀로 남아 지팡이를 다시 들어 올렸다. 조금이라도 진전이 있어야 했다. 지팡이 끝에 마력을 모으는 감각은 마치 손끝으로 물을 움켜쥐려는 것과 비슷했는데, 잡으려 할수록 흩어지는 그 느낌이 답답해서 서린은 몇 번이고 마력을 끌어올렸다가 흩어버리기를 반복했다. 이마에 땀이 배고 팔이 저릿해질 때쯤, 문득 실습장 문가에 누군가 서 있는 걸 발견했다. 하은이었다.
"저기, 저도 잘 못해서…… 같이 연습해도 될까요?" 하은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실습장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도 유리구슬처럼 조심스럽게 울렸고, 두 손으로 지팡이를 꼭 쥐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서린 자신과 닮아 있었다. 서린은 뜻밖의 제안에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요. 같이 해요."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지팡이를 겨누었고, 서로의 실패를 보며 킥킥 웃기도 하고, 어쩌다 한 번 작은 불씨가 튀면 손을 마주 잡고 기뻐하기도 했다. 그 소박한 시간 속에서 서린은 처음으로 원작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작은 안도감에 젖어 있었다. 실습장 구석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서린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저녁 무렵, 기숙사 방으로 돌아와 홀로 지팡이를 손에 쥔 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연습해보자고 마음먹었을 때, 서린의 지팡이 끝에서 순간적으로 불꽃이 아니라 검붉은 균열이 번쩍였다가 사라졌다. 마치 허공에 실금이 그어졌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아무는 듯한, 짧고도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그 순간을 목격한 서린의 등줄기에는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저게 뭐지?'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원작 어디에도 이런 균열에 대한 묘사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