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의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서린을 부축해온 청년—정도윤이라는 이름을 그제야 소개받았다—은 침대에 그녀를 눕히며 조심스레 발목을 살펴보았다. 하얀 시트가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약초 냄새인지 소독약 냄새인지 알 수 없는 은은한 향이 코끝을 스쳤는데, 서린은 그 낯선 냄새조차도 지금 이 상황을 실감나게 만드는 것 같아 묘하게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면 크게 다친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선생님께 진찰을 받아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도윤이 그렇게 말하며 커튼 너머로 목소리를 높였다. "강 선생님, 계십니까?"
대답 대신 느긋한 발소리가 다가왔고, 커튼이 걷히며 나타난 남자를 본 순간 서린은 순간적으로 숨을 삼켰다. 헝클어진 갈색 머리카락, 반쯤 풀린 셔츠 단추, 게으른 고양이처럼 늘어진 자세까지, 도무지 교사라고는 믿기지 않는 분위기였는데—이게 정말 이 학원의 보건교사란 말인가, 게임 설정집에서는 이런 인물 소개가 없었던 것 같은데. 서린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 남자는 서린을 보고는 눈썹을 슬쩍 치켜올리며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걸었다.
"오호, 이런 미인이 다쳐서 왔네." 강윤재는 서린의 발목을 살피는 척하며 손등으로 은근슬쩍 그녀의 무릎을 쓸었고, 서린은 화들짝 놀라 다리를 움츠렸다.
"그, 그러지 마세요!"
"뭘 이렇게 예민해. 진찰이라니까?" 윤재는 낄낄 웃으며 마법 지팡이를 꺼내 발목 위에 가볍게 문질렀는데, 은은한 빛이 스며들자 시큰거리던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빛이 마치 반짝이는 물처럼 발목을 감싸고 흐르는 모습을 서린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마법이라는 게 실존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몸으로 겪는 건 또 다른 감각이었다.
"부기만 살짝 있었네. 하루면 나을 거야." 윤재는 지팡이를 거두며 서린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이름이 뭐야, 아가씨?"
"선우서린…… 입니다."
"선우? 아, 그 마력 명문가?" 윤재의 표정이 흥미롭다는 듯 바뀌었지만, 서린은 그 시선이 반갑지 않아 슬쩍 눈을 피했다. 명문가라는 타이틀이 이렇게까지 부담스러울 줄 몰랐는데, 이 세계에 떨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벌써 그 이름값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이 몸의 원래 주인은 얼마나 대단한 집안 사람이었던 걸까.
"뭐, 명문가 아가씨든 아니든 다친 건 다친 거니까." 윤재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며 지팡이를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그래도 앞으론 조심해. 여기 학원 계단이 은근 미끄러워서 다치는 애들이 한둘이 아니거든."
"네, 조심할게요……." 서린이 얌전히 대답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으려는데, 그 순간 의무실 문이 다시 열리며 딸랑, 문에 달린 작은 종이 울렸다.
낯선 소녀가 안으로 들어섰다. 밝은 갈색 머리를 양쪽으로 묶고, 이 세계 사람들과는 어딘가 다른—더 동그란 눈매와 갈색이라기보다는 짙은 흑빛에 가까운 눈동자를 가진 소녀였다. 마치 세필로 그린 인형처럼 이목구비가 또렷하면서도 어딘가 서투른 몸짓이 남아 있는, 아직 이 세계에 완전히 스며들지 못한 듯한 인상이었다. 서린은 그 얼굴을 마주한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설하은. 게임 화면에서 수백 번은 봤던 그 얼굴이었다. 메인 히로인의 얼굴을, 이렇게 실물로 마주하게 될 줄이야. 서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가, 곧이어 이상하게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반가움인지 경계심인지 알 수 없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였다.
"저, 여기 다친 학생이 있다고 해서요……." 하은이 어색하게 말을 꺼내며 서린을 향해 다가왔는데, 그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워서 마치 낯선 방에 처음 들어온 고양이 같았다. 도윤이 재빨리 소개했다.
"이쪽은 선우서린 양입니다. 하은 양은 신입생이시죠?"
"아, 네. 저는 이제 막 입학해서 이곳 규칙을 잘 몰라서……" 하은이 곤란한 표정으로 웃자, 서린은 순간 마음속에서 이상한 조바심이 솟는 것을 느꼈는데, 이건 반드시 잘해줘야 할 상대라는 자각 때문이었다. 메인 스토리에서 하은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온갖 이벤트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서린은 플레이 시간만 수백 시간을 쏟아부었던 만큼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이 아이한테 밉보이면 안 된다. 절대로.
"괘, 괜찮아요, 저도 처음이라 잘 모르는 게 많아서." 서린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붙였고, 하은은 그 말에 안심한 듯 눈을 크게 뜨며 웃었다.
"정말요? 다행이다…… 저만 이렇게 헤매는 줄 알았어요." 하은이 두 손을 모으며 살짝 미소를 지었는데, 그 표정이 게임 일러스트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생기 있고 사람 냄새가 나서, 서린은 다시금 이상한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림 속에 있던 존재가 눈앞에서 숨을 쉬고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 순간 윤재가 팔짱을 낀 채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끼어들었다. "둘 다 이 학원 예법을 하나도 모르나 보네. 신입생 다과회에서 격식 안 지키면 큰일 나는데."
"다, 다과회요?" 서린이 되묻자, 윤재는 씩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오늘 오후에 있잖아, 다들 드레스 코드 맞춰서 오는데, 아무도 안 알려줬어?" 윤재가 짐짓 놀란 척 눈썹을 치켜올리며 도윤을 슬쩍 쳐다보았다. "야, 정도윤. 너 이거 안내 담당 아니었어?"
"제가 안내를 맡은 건 오늘 아침부터입니다만……" 도윤이 살짝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서린과 하은을 번갈아 보았다.
서린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게임에서 이런 이벤트가 있었던가. 다과회, 드레스 코드—이건 튜토리얼에도 없던 옵션 이벤트였다. 대체 몇 번째 회차부터 열리는 이벤트인 건지, 혹시 이 세계가 게임 설정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은 건지, 별의별 생각이 서린의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갔다. 만약 이게 진짜 처음 보는 콘텐츠라면, 그야말로 예측 불가능한 함정이 될 수도 있었다.
"저, 저는 뭘 입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하은이 옆에서 울상을 지으며 중얼거렸는데, 서린은 그 모습을 보며 자신도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서린이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 도윤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크게 어려운 예법은 아니니 걱정 마세요. 두 분 다 처음이시니, 제가 옷차림부터 순서까지 하나씩 짚어드리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다정한 목소리에 서린은 귀 끝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는데,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도윤이 특별히 다정하게 말한 것도 아닌데, 그저 침착하고 나긋한 그 어조가 마음을 이상하게 건드렸다. 옆에 있던 하은도 안심한 듯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도윤 씨……" 하은이 말끝을 흐리며 두 손을 모았고, 서린도 얼떨결에 따라 고개를 숙였다. "저도 감사해요."
다만 윤재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입꼬리를 슬쩍 올리는 것이, 어쩐지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마치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발견한 사람처럼, 윤재는 팔짱을 낀 채 세 사람을 번갈아 보며 낮게 웃음을 흘렸다.
"거참, 재밌는 조합이네." 윤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서린의 귀에 얼핏 스쳤는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물어볼 새도 없이 도윤이 이미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자, 그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야겠습니다." 도윤이 커튼을 걷으며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서린은 다친 발목이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것도 잊은 채, 뭔가에 홀린 듯 그 손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의무실 창밖으로 오후의 햇살이 길게 늘어지고 있었고, 그 빛 속에서 세 사람의 그림자가 나란히 겹쳐졌다. 앞으로 벌어질 다과회가 대체 어떤 자리일지, 서린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