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밤이 깊어지고 나서도 다연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낮에 떠올렸던 최악의 상상이 자꾸만 눈앞에 되풀이되었다.
소이의 손목을 붙잡던 이겸의 손, 그 손끝에 어리던 서늘한 기운, 그리고 그 뒤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어 보이던 한서준의 미소까지.
낮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장면들이 밤이 되어서야 하나씩 되살아나 다연의 가슴을 짓눌렀고, 결국 참지 못한 다연은 이불을 젖히고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섰다.
'소이 얼굴을 한 번만 더 보고 자야겠어.'
그런 마음으로 걸음을 옮긴 다연은 발끝으로 마룻바닥을 짚어가며 조심스럽게 걸었고, 밤공기가 서늘하게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괜한 불안이 자꾸만 등을 밀어붙이는 것 같았다.
복도의 끝, 소이의 방문 앞에 다다른 다연은 노크를 하려던 손을 멈춘 채 문틈으로 스며나오는 희미한 불빛을 발견했다.
'아직 안 자나…….'
그런 생각으로 잠시 귀를 기울였지만, 문 안쪽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려오지 않았고, 다연은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감쌌다.
삐걱.
조심스럽게 문을 밀어 열자, 소이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이불을 반쯤 걷어찬 채 새근새근 숨을 내쉬는 소이의 얼굴은, 낮 동안 다연을 괴롭혔던 모든 불안이 다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평온했고, 방 안에는 은은한 등불 하나만이 켜져 협탁 위로 노란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다연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소이의 숨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안도가 되는 것을 느꼈지만, 그 안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다연의 시선은 협탁 위에 놓인 작은 상자에 저절로 멈추었다.
낡고 소박한 나무 상자, 언뜻 보기에는 별다를 것 없는 그 상자를, 다연은 왜 하필 지금 저것이 눈에 들어왔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으나, 손이 먼저 움직여 상자의 뚜껑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 안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목걸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숨이 턱, 목구멍에서 멈췄다.
가느다란 은사슬 끝에 매달린, 작은 새 모양의 펜던트.
한쪽 날개가 살짝 깨져 있는 그 독특한 형태를, 다연은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이건…….'
게임 '영겁의 새장'의 오프닝, 그 첫 화면을 여는 순간 여주인공의 손에서 반짝이던 바로 그 목걸이였다.
서은은 그 오프닝 일러스트를 수백 번도 넘게 보았고, 로딩 화면마다 등장하던 그 새장 모양의 로고와 깨진 날개의 펜던트를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을 만큼 각인시켰던 기억이 손끝을 타고 되살아났다.
책상 앞에 앉아 밤을 새워가며 공략을 정리하던 그날들, 화면 속 캐릭터 하나하나의 대사를 스킵 없이 다 읽으며 분기점을 외우던 자신의 모습이 문득 눈앞에 겹쳐졌고, 그 기억이 너무 선명해서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꿈이 아니었어. 이건 그냥 비슷한 이야기가 아니야. 진짜 그 게임이야. 그 게임 그대로야…….'
말줄임표로 흐려지던 생각 끝에 다연의 손이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고, 등불에 비친 은빛 펜던트가 미세하게 흔들리며 반짝였다.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감각과 동시에, 어딘가 이상하게도 안도에 가까운 확신이 함께 밀려들었다.
'그렇다면.'
다연의 머릿속에서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순식간에 맞춰지기 시작했다.
이 세계는 자신이 착각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 게임의 세계였고, 그렇다면 그 안에서 벌어질 모든 사건과 결말을,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겸의 손목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손목 안쪽에 숨겨진 흉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서준의 미소 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그가 왜 늘 소이의 곁을 스치듯 지나가면서도 결코 먼저 다가서지 않았는지, 심지어 아직 등장하지 않은 두 사람의 공략 대상이 어떤 방식으로 소이 앞에 나타날지조차, 전부.
'그러니까 나는, 이 판을 다시 짤 수 있어.'
확신에 찬 그 생각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올랐다.
이번에는 다르게 만들 수 있다고, 소이가 그 지독한 결말들 중 어느 하나에도 걸려들지 않게 할 수 있다고, 다연은 목걸이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되뇌었다.
그러나 그 순간 목걸이를 쥔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며 다연은 문득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왜 이게 소이의 방에 있는 거지. 왜 벌써…….'
오프닝에서 이 목걸이가 등장하는 시점은 언제나 여주인공이 첫 번째 위험한 인물과 마주하기 직전이었다는 사실을 다연은 뒤늦게 떠올렸다.
게임 속에서 이 펜던트는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새장 안에 갇힌 자'라 불리는 존재에게만 나타나는 징표였고, 그 징표가 나타난 순간부터 여주인공의 주변에는 반드시 하나 이상의 위협이 그림자처럼 따라붙기 시작한다는 설정이었다는 것을, 다연은 손끝의 감각을 통해 서서히 되찾고 있었다.
즉 이 목걸이가 소이의 방에, 이렇게 아무런 예고도 없이 놓여 있다는 것은, 이미 게임의 톱니바퀴가 소리 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뜻이었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훑고 지나갔다.
'설마 벌써…….'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한 채, 다연은 잠든 소이의 얼굴을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너무도 평온한 그 얼굴이, 지금은 오히려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삐걱.
등 뒤에서 마룻바닥이 눌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다연은 온몸의 신경이 한순간에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목걸이를 쥔 손을 등 뒤로 감췄고, 숨을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방문 앞에 낯익은 그림자 하나가 소리 없이 서 있었다.
어두운 실내에서 그 얼굴을 알아본 순간 다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은빛 머리카락이 등불의 희미한 빛을 받아 서리처럼 흐릿하게 빛났고, 그 아래로 드러난 회색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이상할 만큼 또렷하게 다연을 향해 있었다.
한서준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소이의 방문 앞에 서서 다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다.
'언제부터…….'
목구멍 안쪽이 바짝 말라오는 것을 느끼며, 다연은 등 뒤에 감춘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