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소이가 시녀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돌아간 뒤, 다연은 홀로 남은 응접실 소파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고, 심장은 여전히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문 닫히는 소리가 복도 저편에서 나직하게 울렸다.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다연은 비로소 숨을 크게 들이쉴 수 있었는데,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오래 숨을 참고 있었는지조차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놀라고 말았다.
'대체 언제부터였지. 언제부터 이 모든 게 시작된 거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답을 찾으려는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며 시야가 흐려지더니, 낯설지 않은 풍경이 통째로 밀려들어왔다.
좁은 원룸, 창문에는 늘 암막 커튼이 쳐져 있었고, 책상 위에는 다 식은 컵라면 용기가 며칠째 방치되어 있었으며, 바닥에는 배달 음식 영수증들이 눈처럼 쌓여 있었다.
강서은.
그 이름이 다연의 입 안에서 낮게 굴러다녔고, 그 삶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시큰하게 저려왔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자리를 잡지 못한 채 편의점과 카페를 오가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나날, 면접에서 몇 번이고 떨어질 때마다 조금씩 깎여나가던 자신감,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력서를 넣는 것조차 그만두어버린 시간들이 하나씩 되살아났다.
가족과도 오래전에 연락이 끊긴 채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둬버린 시간들, 명절이면 걸려오던 어머니의 전화조차 받지 않게 된 지 몇 해였는지 세는 것도 무의미해진 시절, 그 안에서 유일하게 숨 쉴 구멍이 되어주었던 것은 밤마다 켜는 모니터의 불빛이었다.
'영겁의 새장.'
18세 이용, 다중 루트 연애 시뮬레이션이라 불리는 그 게임을 서은은 몇 번이고 회차를 반복하며 플레이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게임 속 세계가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는 것을 그녀 자신도 부정할 수 없었다.
게임 속 세계는 오래전 몰락한 왕가의 핏줄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권력을 되찾으려 다투는 대륙을 배경으로 했고, 플레이어가 선택하는 루트에 따라 여주인공의 운명과 곁을 지키는 인물이 전혀 다르게 갈라지는 구조로 짜여 있었으며, 그중 몇몇 루트는 유독 잔혹한 결말로 끝난다는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부주인공 위치의 캐릭터,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려 눈을 반쯤 가린 채 좀처럼 웃지 않던 그 남자, 강무영을 서은은 지독하게 애정했었다.
칠흑처럼 짙은 머리카락이 밤하늘을 그대로 잘라온 듯 흘러내렸고, 그 사이로 언뜻 드러나는 눈동자는 서리가 내린 겨울 호수처럼 차가웠으며,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 입술은 마치 오랜 세월 굳게 닫힌 성문과도 같았다는 것을, 서은은 셀 수 없이 많은 밤 동안 화면을 들여다보며 되새기고 또 되새겼었다.
'현실에는 없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더 안전하게 좋아할 수 있었으니까.'
그 자조적인 되뇌임이 아직도 귀에 선명하게 들리는 듯해서, 다연은 손끝을 떨었다.
서은의 마지막 기억은 뚜렷하지 않았다. 다만 밤새 게임을 하다가 잠든 사이, 이유를 알 수 없는 두통과 함께 의식이 아득해졌던 감각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고,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던 그 순간에도 모니터 속 강무영의 마지막 대사를 곱씹고 있었다는 것만이 유일하게 선명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선우다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자신이 그토록 몰입했던 게임의 세계 안에 서 있었다.
'그런데 왜, 왜 하필 이 몸이지. 왜 하필 이 위치지…….'
말줄임표로 흐려지는 생각 끝에 다연은 다시 눈을 떴고, 응접실의 익숙한 천장이 시야에 들어오자 그제야 현재로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흥건히 배어 있었다.
악역 영애, 선우다연.
게임 속에서 이 이름은 늘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다연은 회상 속에서 몇 번이고 확인한 바 있었다.
"저 여자가 또 저러네. 동생 앞길이나 막지 않으면 다행이지."
"선우 가문 장녀라는 사람이 저렇게 질투에 눈이 멀어서야, 원."
게임 텍스트 속에서 다른 등장인물들이 자신을 향해 내뱉던 대사들이 하나둘 되살아났고, 그 냉소적인 문장들이 지금은 더 이상 화면 속 글자가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실제 시선이 될 것임을 다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
몇 번을 회차했던가, 다연은—아니, 서은은—선우다연이 등장하는 장면마다 마우스 스크롤을 서둘러 넘겼던 자신의 손가락을 떠올렸고, 그 손가락이 지금은 자신의 것이 되어 이 몸에 그대로 붙어 있다는 사실이 기묘하게 낯설었다.
손등을 내려다보자 낯선 흰 피부가 눈에 들어왔고, 이것이 자신의 손이 맞는지 몇 번이고 쥐었다 펴보아도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어.'
다연은 낮게 숨을 내쉬며 다짐했다.
'경멸당해도 좋아. 그러니까 소이만은…….'
문장을 끝맺지 못한 채로 다연은 자리에서 일어섰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정원을 산책하는 소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이 불었다.
밤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이는 그 평범한 풍경이 오늘만큼은 이상하게도 위태로워 보였고, 다연은 그 자리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서 있었다.
가느다란 목덜미며, 걸음마다 살짝 흔들리는 여린 어깨며, 볕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뺨의 곡선까지도, 다연의 눈에는 하나하나가 유리세공처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것처럼 비쳤고, 그 모든 것이 언제라도 손끝 하나로 부서질 수 있다는 사실을 다연만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저 아이가 저 게임의 여주인공이라는 걸, 저 아이 자신은 절대로 알지 못하겠지.'
그 생각에 다다르자 다연의 손끝이 다시 떨렸고, 그녀는 이제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서서히 정리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게임 속에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봐왔던 그 모든 루트들, 그 결말들.
어떤 루트에서는 소이가 무영의 손에 웃으며 죽어갔고, 또 다른 루트에서는 소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으며, 가장 좋은 결말이라 불리던 루트에서조차 선우다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몸은 결국 파멸하는 것으로 퇴장할 뿐이었다는 사실을, 다연은 하나씩 되짚으며 다시금 확인했다.
그중 몇몇 결말은 유독 선명하게 남아 있었는데, 소이가 웃으며 건넨 마지막 인사가 사실은 배신의 신호였던 루트도 있었고, 선우다연의 몰락이 다른 인물들의 즐거운 뒷담화 소재로만 남는 루트도 있었다는 것을 다연은 손끝으로 창틀을 짚으며 곱씹었다.
지금부터는 그것들을 하나씩 되짚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 위태로운 뒷모습이 언젠가 정말로 무너져 내리는 순간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 할 것이었고, 다연은 그 순간만은 결코 오게 하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다만 문제는, 그 모든 루트 속에서 선우다연이 살아남는 결말은 단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