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정원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소이가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 다연은 자신의 서재에 홀로 앉아 게임의 구조를 다시금 처음부터 되짚기 시작했다.
창문 너머로 저물어가는 햇살이 서재 안으로 길게 늘어져 들어왔고, 그 빛이 책상 위에 놓인 종이 위로 비스듬히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다연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리고 있었다.
'영겁의 새장'은 하나의 여주인공을 중심으로 여러 명의 공략 대상이 존재하는 다중 루트 연애 시뮬레이션이었고, 각 공략 대상마다 독립된 스토리 라인과 결말이 존재했다는 것을 다연은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되새겼다.
왕세자 이겸, 공작가의 적자 한서준, 호위무사 강무영, 그리고 아직 등장하지 않은 천재와 학당의 교사.
다연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그 이름들을 되짚었는데, 마치 시험을 앞둔 학생이 마지막으로 암기한 것을 확인하듯 조바심 어린 손짓이었고, 실제로 이 게임 속 세계에서 다연이 틀려서는 안 되는 유일한 시험이 바로 이것이었다.
대부분의 루트는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특정 조건이 충족되지 않거나 특정 선택지를 잘못 골랐을 때 진입하게 되는 이른바 '이중 루트'라 불리는 것이 존재했고, 그것이야말로 다연이 가장 두려워하는 구조였다.
전생의 다연은 그 이중 루트를 컨텐츠의 일부로만 여기며 소비했었다. 화면 속 캐릭터가 광기에 물든 표정으로 여주인공을 몰아붙이는 장면을 보면서도, 그저 '이런 전개도 있구나' 하며 흥미롭게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그때는 그게 그저 이야기였는데.'
이제는 그 이야기 속 여주인공의 자리에 자신의 동생이 앉아 있다는 사실이, 다연의 가슴을 서늘하게 짓눌렀다.
이중 루트에 진입한다는 것은, 공략 대상이 표면적인 성격 이면에 숨겨두었던 광기와 소유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순간을 의미했으며, 그 순간부터 여주인공은 더 이상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라 소유되고 억압되는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어 있었다.
이겸의 이중 루트에서는 소이가 궁 깊은 방에 갇혀 지위와 권력으로 강제 결혼을 당하는 결말이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지만 다연이 진짜로 두려워하는 것은 다른 인물의 루트였다.
한서준.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다연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은빛 머리에 회색 눈동자를 가진, 겉으로는 누구보다 온화하고 매력적인 공작가의 적자이자 다연과 소이의 유년 친구였던 그 남자는, 게임 속에서 가장 지독한 반전을 숨기고 있는 캐릭터였다.
다연은 눈을 감고 서준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와, 상대를 편안하게 만드는 나긋한 목소리, 그리고 언제나 적당한 거리에서 예의를 지키는 몸짓까지 — 그 모든 것이 완벽하게 짜인 가면이었다는 것을, 다연은 이 세계에 떨어진 순간부터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그러니까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사람.'
전생에서 그 루트를 처음 클리어했을 때, 다연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화면 속 서준이 웃으며 여주인공의 뺨을 어루만지던 손이, 다음 장면에서는 그녀의 목을 조르는 손으로 바뀌는 그 낙차가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중 루트에 진입하면, 서준은 소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유'하기 위해 그녀를 별채에 감금하고 모욕하며, 그 과정에서 방해가 되는 인물, 즉 자신을 가장 위험하다고 지목했던 언니를 제거하는 선택을 한다는 것을 다연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 속에서, 서준의 대사 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언니라는 존재가 없어지면, 너는 온전히 내 것이 될 수 있을 텐데."
그 대사를 처음 읽었을 때는 그저 소름 끼치는 대본의 한 줄이었을 뿐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다연에게는 그것이 실제로 자신의 목숨을 겨눈 예언처럼 느껴졌고, 그 생각이 들자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절대로, 절대로 소이가 서준에게 마음을 열게 두면 안 돼.'
확신에 찬 다짐이 다연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그 순간, 서재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그 소리에 다연은 흠칫 어깨를 떨었는데,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누군가에게 들킨 것처럼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영애님, 왕세자 전하께서 호위무사를 소개하고 싶다 하시며 다시 방문하셨습니다."
시종의 목소리에 다연은 자리에서 일어섰고, 응접실로 향하는 걸음이 자신도 모르게 빨라지고 있었다.
'왕세자가, 다시…….'
이겸이 하루도 지나지 않아 다시 찾아왔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보다 다연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다른 이름이었다.
호위무사.
그 단어를 듣는 순간부터 다연의 가슴 한쪽이 이상하게 뻐근해지기 시작했고, 복도를 걷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평소보다 무겁게, 동시에 어지럽게 느껴졌다.
'설마…….'
응접실 문을 열자, 이겸의 뒤편에 서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고, 그 순간 다연은 숨을 삼키고 말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를 가릴 만큼 길게 늘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언뜻 보이는 눈매는 날카로우면서도 어딘가 서늘한 인상을 풍겼는데, 그것은 다연이 전생에서 몇백 시간을 쏟아부으며 화면 속으로만 지켜보던 얼굴, 강무영이었다.
곧게 뻗은 콧대와 다물어진 입술의 선까지, 화면 속에서 무수히 보아왔던 그 각도 그대로였고, 심지어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손의 모양조차 다연이 기억하는 일러스트와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진짜로 있어. 진짜로 존재하고 있어…….'
말줄임표로 흐려지는 감정 속에서 다연은 자신의 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크게 뛰는 것을 느꼈고, 그 감각이 단순한 반가움만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전생에서 다연은 무영의 루트를 가장 많이 플레이했었다. 몇 번이나 같은 대화를 다시 듣고, 몇 번이나 같은 결말을 다시 보면서도 지겹지 않았던 유일한 캐릭터였다는 것을, 이제 와서야 다연은 새삼스럽게 떠올리고 말았다.
이겸이 형식적인 소개말을 건네는 사이, 다연의 시선은 오직 무영에게서 떠나지 않았고, 그 시선을 느낀 무영이 아주 잠깐 고개를 들어 다연을 마주 보았다.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무영의 눈동자는 화면 속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짙고, 훨씬 서늘했으며, 동시에 그 안에 알 수 없는 경계심이 서려 있는 것이 다연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경계하고 있어. 나를…….'
그 시선이 던지는 무게가 다연의 예상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고, 마치 자신이 어떤 시험대 위에 올라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선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이겸이 무영을 향해 무언가 짧게 지시를 내리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다연의 귀에는 그 말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시야 가득 무영의 얼굴만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얼굴을 확인하고 확인해도 부족하다는 듯 다연의 눈은 계속해서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다연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서고 말았다.
그 걸음을 알아차린 것인지, 무영의 눈매가 아주 미세하게 좁아졌고, 그 반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미처 헤아리기도 전에 응접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을 다연은 느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