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마차는 흔들렸고, 나는 창밖으로 스쳐가는 청호 영지의 풍경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들판 곳곳에 검은 안개 같은 것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게 장기구나.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짙고 음습했다.
마치 미세먼지 최악 등급 날씨를 시각화한 느낌이었다.
창문을 살짝 열자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숨을 들이켜자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창문 닫으십시오. 장기에 오래 노출되면 성녀님도 무사하지 못합니다."
마부석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순순히 창문을 닫았다.
무사하지 못하다는 말이 살짝 걸렸지만, 이미 익숙한 감각이었다.
전생에도 매일 무사하지 못한 몸으로 출근했으니까.
야근 수당도 없이 갈려나가던 그 시절과 뭐가 다를까 싶었다.
그때는 미세먼지 대신 사무실 형광등 밑에서 시들어갔고, 지금은 장기 밑에서 시들어가는 거고.
본질적으로 노동 환경이 열악하다는 점은 똑같지 않나.
마차가 점점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바퀴 소리가 자갈길에 부딪치며 덜컹거렸고, 나는 창밖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검은 실루엣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저택에 도착하자 거대한 흑색 성벽이 나를 맞이했다.
청호 공작가.
돈 지랄 보소, 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올 정도의 규모였다.
성벽 위로 솟은 첨탑만 셋이었고, 정문 앞에 늘어선 기사들은 하나같이 갑옷을 반짝반짝하게 닦아놓았다.
그러나 화려함 속에 어딘가 삭막한 기운이 감돌았다.
정원의 나무들도 반쪽이 시들어 있었고, 하늘 색깔도 어딘가 칙칙했다.
장기의 영향인 듯했다.
가까이서 보니 정원사가 시든 나무 밑동에 물을 주고 있었는데, 표정이 영 체념한 얼굴이었다.
아무리 물을 줘도 소용없다는 걸 이미 아는 얼굴.
나도 저 얼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전생에 야근하면서 커피 마시던 내 얼굴이 딱 저랬을 거다.
마차에서 내리자 집사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성녀님, 오시는 길 불편하지 않으셨습니까."
"편했어요. 장기 냄새만 빼면요."
집사는 잠시 멈칫했다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판단이 안 서는 눈치였다.
솔직히 나도 반반이었다.
그는 나를 응접실로 안내했고,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최시우를 마주했다.
키가 크고, 흑발에 은빛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표정이 없다는 말이 딱 맞았다.
조각상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미동조차 없었다.
응접실 벽에 걸린 초상화 속 인물과 실물이 거의 똑같았는데, 그 초상화조차 무표정이었던 걸 보면 원래 저런 얼굴로 태어난 게 분명했다.
가문 대대로 무표정 유전자가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서지은."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방식은 마치 서류 검토하듯 건조했다.
이름을 부르는데 억양이 하나도 없다는 게 신기했다.
로봇도 이보다는 감정이 있을 것 같은데.
"이 계약은 순수한 거래다. 나는 청호의 장기 정화를 원하고, 성전은 기부금을 원한다. 그 사이에서 너는 도구로서 역할을 다하면 된다."
도구.
적나라한 표현에 나는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전생 회사에서도 대표가 이렇게 솔직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적어도 뒤통수는 안 맞았을 텐데.
돌이켜보면 전생 대표는 늘 "우리는 가족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뒤로는 야근을 강요했다.
가족한테 야근수당 안 주는 집안이 어디 있냐고 그때 따지고 싶었는데, 이번 생에서는 최소한 솔직하게 도구라고 불러주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적어도 위선은 없잖아.
"애정 같은 건 기대하지 마라. 이건 계약이고, 계약에는 감정이 필요 없다."
최시우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딱히 애정을 바라진 않아요."
내 대답이 예상 밖이었는지 그가 살짝 눈썹을 움직였다.
아주 미세하게.
"…그런가."
짧은 정적이 흘렀다.
집사가 옆에서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아마 성녀란 존재는 보통 이런 계약에 눈물을 보이거나, 최소한 서운한 기색을 내비쳐야 정상인 모양이었다.
근데 나는 그런 거 없었다.
전생에 이미 감정 소모할 곳에서 다 소모하고 왔거든.
나는 그 틈을 타 조건을 하나 걸기로 했다.
이왕 팔려가는 인생, 최소한의 낙은 챙겨야 하지 않겠나.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요."
"조건?"
"주 1회, 저와 함께 술을 마셔주세요."
응접실 안에 정적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집사도, 옆에 서 있던 종자도 순간 얼음이 된 것처럼 굳었다.
누군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최시우의 표정에도 처음으로 균열이 갔다.
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가고, 입가가 미묘하게 굳었다.
조각상에 처음으로 미세한 균열이 생기는 순간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역사적인 순간이네, 이거.
"…뭐라고 했지."
"술이요. 함께 마시는 거요."
"이유는."
그가 되물었다.
목소리에 미묘하게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마치 내가 무슨 함정을 파는 건 아닌지 재는 눈치였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전생의 과로사가 이유라고 하면 이해를 못 할 테니, 다르게 포장해야 했다.
"성녀의 정화 능력은 심신의 안정과 관련이 깊거든요. 마음이 편해야 능력도 잘 발휘돼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정화 마법은 감정 상태에 영향을 받는다고 신전에서도 배운 적이 있으니까.
다만 내가 원하는 진짜 이유는, 이 삭막한 세계에서 그나마 사람 사는 냄새 나는 시간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다.
전생의 나는 회식도, 퇴근 후 맥주 한잔도 없이 일만 하다 죽었다.
주변 동료들이 다 퇴근하고도 나만 남아서 야근하던 그 밤들이 아직도 생생했다.
이번 생에서는 적어도 그 정도의 여유는 챙기고 싶었다.
계약결혼이라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감정 없는 관계라서 더 편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진심을 걸고 상처받을 일은 없을 테니까.
그 대신 소소한 낙 하나쯤은 챙기겠다는 게 내 나름의 생존 전략이었다.
최시우는 한동안 나를 응시했다.
마치 계산기를 두드리는 표정이었다.
머릿속으로 손익을 계산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 계약이 나에게 손해인가, 이득인가.
술 한잔 같이 마셔주는 게 그렇게 대단한 손해는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그의 은빛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좋다. 그 조건은 받아들이지. 단, 업무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생각보다 쉽게 승낙이 떨어졌다.
나는 속으로 조용히 쾌재를 불렀다.
이번 인생, 술이라도 마실 수 있으면 그나마 살 만하지 않을까.
전생에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마신 술이 편의점 캔맥주였다는 걸 생각하면, 이번엔 좀 더 그럴싸한 자리에서 마실 수 있겠다 싶었다.
공작가 저택에서 마시는 술이라니, 스케일이 다르긴 하네.
집사가 조용히 옆에서 헛기침을 했다.
아무래도 이 대화가 너무 예상 밖으로 흘러가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을 못 잡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나의 계약결혼이 성립되었다.
실리적인 거래, 감정 없는 관계.
그게 이 세계에서 내가 살아갈 방식이었다.
응접실을 나서기 전, 나는 창밖으로 다시 한번 시든 정원을 바라보았다.
이 삭막함 속에서도 주 1회 술자리 하나쯤은 확보했으니, 그럭저럭 성공적인 하루였다.
전생이었다면 이 정도 협상력으로 연봉 인상도 받아냈을 텐데, 아쉽게도 이번 생의 협상 상대는 연봉 대신 술자리를 내줬다.
뭐, 그것도 나름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최시우가 자리를 뜨기 전, 나를 향해 던진 한마디가 마음에 걸렸다.
"너, 정말 성녀답지 않군."
낮고 건조한 목소리였는데, 그 안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비웃음인지, 감탄인지, 혹은 경계인지.
그의 은빛 눈동자가 잠깐 나를 스치듯 훑고 지나갔다.
그 시선에 등줄기가 살짝 서늘해졌다.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다만 확실한 건, 이 남자가 지금까지 만나온 성녀들과 나를 어딘가 다르게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게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는, 앞으로 알아가야 할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