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냉혈공작, 술에는 진심

1화

쿵. 무릎이 대성당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닿는 순간, 나는 아, 이거 완전 익숙한 각도인데 하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팀장한테 불려가 시말서 쓰던 그 자세랑 똑같았다. 허리는 곧게, 시선은 아래로, 표정은 무해하게. 사회생활 짬바가 어디 가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서,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신전 사제복을 입고 있고, 눈앞엔 대주교 한명훈이 성경을 든 채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머리 위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알록달록하게 쏟아지고 있었는데, 색깔만 예뻤지 나한테는 딱히 위로가 안 됐다. 원래 아름다운 풍경도 회사에서 야근하다 보는 창밖 노을이랑 비슷한 취급을 받으면 그냥 배경일 뿐이다. "성녀 서지은은 청호 공작가와의 혼인을 통해 신의 뜻을 이룰 것이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들어봤자 좋은 소리는 안 나올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서지은. 그게 내 이름이었다. 중앙 대성당에서 자란 고아 출신이라 성(姓)도 없이 그저 서지은으로 불렸고, 열두 살 때부터 정화 능력이 있다는 걸 들켜 지금까지 신전의 도구처럼 굴려졌다.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기침을 심하게 앓던 옆방 아이의 몸에서 시커먼 기운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걸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고, 그 손끝에서 빛이 흘러나와 그 아이의 열을 씻어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아이가 아니라 자원이었다. 그리고 나는, 정확히는 이 몸에 들어온 뭔가는, 전생에 대한민국에서 야근에 야근을 거듭하다 과로사한 회사원이었다. 서지은으로 눈을 뜬 그날, 머릿속에 낯선 기억들이 쏟아져 들어왔을 때 나는 이게 무슨 사이트 로딩 실패인가 싶었다. 엑셀 단축키가 기억나고, 회식 자리 눈치가 기억나고, 부장님 잔소리 타이밍까지 기억나는데, 정작 이 세계에서 내가 뭘 해야 하는지는 하나도 모르겠는 상황. 그야말로 헬모드 인생 2회차였다. 전생과 이번 생의 기억이 뒤섞여서 가끔은 내가 서지은인지, 그 이름 모를 회사원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확실한 건 딱 하나, 둘 다 자기 인생의 결정권이 없었다는 것. "공작께서 정화 능력을 대가로 막대한 기부금을 약속하셨다. 이는 성전의 미래를 위한 결정이다." 한명훈의 목소리는 마치 회사 대표가 인수합병 발표하듯 태연했다. 억양 하나 흔들리지 않는 게, 이 사람도 이 자리에서 이런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봤다는 티가 났다. 나는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또 팔려가네. 전생에는 회사에 갈려나갔고, 이번 생에는 신전에 갈려나가다가 이제는 공작가에 팔려간다. 인생이 참 일관성 있게 나를 대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약직에서 정규직 전환되나 싶더니 결국 파견직으로 재계약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고개를 들어 대주교의 얼굴을 봤다. 주름진 눈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는데, 그게 진짜 신을 위한 미소가 아니라 통장 잔고 늘어나는 걸 상상하는 미소라는 걸 나는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전생에 사람 표정 읽는 걸로 밥 벌어먹던 경력이 있으니까. 영업 뛰던 시절, 클라이언트 표정만 보고도 오늘 계약이 될지 안 될지 감을 잡았던 그 눈치가, 놀랍게도 신전 대주교한테도 똑같이 적용됐다. 인간은 어느 세계든 욕망 앞에서는 똑같은 표정을 짓는구나 싶어서 잠깐 웃음이 나올 뻔했다. "성녀는 청호 영지로 즉시 이송될 것이다. 그곳의 장기(瘴氣)가 심각한 수준이라 하니, 성녀의 힘이 필요할 것이야." 장기라는 단어에 나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장기라 함은 이 세계에서 마물이나 저주받은 땅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으로, 사람을 병들게 하고 땅을 썩게 만드는 존재였다. 성녀의 정화 능력만이 그걸 없앨 수 있다는 게 이 세계의 국룰이었고, 나는 그 국룰의 유일한 실행자 중 하나였다. 말하자면 나는 걸어다니는 공기청정기였다. 필터 교체 없이 평생 가동되는, 그것도 무상으로. A/S 요청은 수시로 들어오는데 정작 내 몸 관리해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게 이 직업의 가장 큰 단점이었다. "영지의 심각도는 어느 정도인가요." 내가 입을 열자 대주교의 눈이 살짝 커졌다. 주변에 서 있던 다른 사제들도 미묘하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왜 저렇게 의아한 반응이지. 생각해보니 이제까지 성녀들은 다들 순종적으로 고개만 끄덕였을 테니, 질문하는 내가 신기했나 보다. 하긴, 도구가 스스로 성능 스펙을 물어보는 경우는 잘 없으니까. "…그건 성녀가 알 필요 없는 사안이다." 대주교가 헛기침을 하며 대답을 회피했다. 말이 헛기침으로 끝나는 순간, 나는 이미 답을 반쯤 얻은 셈이었다. 말 못할 정도로 심각하다는 뜻이니까. 전생에 상사가 "그건 나중에 알려줄게"라고 할 때마다 십중팔구 폭탄이 숨어 있었던 것처럼.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차피 가서 보면 알 일이니까. 전생에도 그랬다. 입사 전에 회사 설명 들을 땐 다 좋은 말만 하고, 실제로 출근해보면 지옥문이 열려 있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니까. 복지 좋다는 말에 속아서 들어갔더니 야근수당도 안 나오던 그 회사가 떠올랐다. 이번에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서서히 차올랐다. "성녀 서지은은 사흘 후 청호로 출발한다. 공작가에서 마차를 보낼 것이다." 대주교의 선언이 끝나자 곁에 서 있던 사제들이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마치 배웅하듯, 그러나 실은 안도하듯. 짐짝 하나가 드디어 나간다는 표정들이었다. 몇몇은 대놓고 안도의 숨을 내쉬기까지 했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 신전에서 내가 얼마나 부담스러운 존재였는지를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내가 정화 능력을 발휘할 때마다 신전의 위신은 올라갔지만, 동시에 내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이들에게는 관리해야 할 리스크였을 테니까. 정규직인데 회사 눈치는 계약직만큼 봐야 하는, 그런 애매한 위치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릎을 툭툭 털었다. 먼지가 묻은 것도 아닌데 습관처럼 나온 동작이었다. 전생의 나였다면 이 순간 분노하거나 절망했을지도 모른다. 사표를 던지고 싶어도 던질 곳이 없어서 속으로만 백 번쯤 사표를 쓰던 그 심정으로.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냥 담담했다. 어차피 이 세계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으니까. 선택권 없는 인생에 익숙해지는 것도 스킬이라면, 나는 이미 만렙을 찍은 셈이었다. 다만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청호 공작이라는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소문으로는 냉혈공작이라 불릴 만큼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던데, 전쟁터에서 적군의 목을 베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며, 자기 영지민이 죽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는 이야기까지, 신전 안에서 떠돌던 소문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물론 소문이라는 게 대체로 반쯤 뻥이 섞여 있다는 걸 나는 전생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그랬으니까. 새로 오는 팀장이 인성 갑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알고 보니 그냥 말을 안 하는 스타일이었던 적도 있고, 반대로 조용해 보이던 사람이 알고 보니 최악의 빌런이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니 청호 공작에 대한 소문도 반쯤은 걸러 들어야 할 터였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이번 생도 참 재미없게 흘러갈 것 같았다. 무표정한 상사 밑에서 일하는 게 얼마나 피곤한지는 이미 전생에서 충분히 경험했으니까. 감정 표현이 없는 사람일수록 뭘 원하는지 파악하기가 더 어려웠고, 그 어려움은 곧 스트레스로 직결됐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흘 후, 신전 정문 앞에 도착할 마차와 그 마차 안에서 나를 기다릴 무언가에 대해서는, 나는 아직 아무것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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