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저택의 회랑은 겨울 안개로 뒤덮여 있어서, 낮에도 등불을 켜야 겨우 발밑을 가늠할 수 있었다. 벽에 걸린 가스등이 희끄무레한 빛을 뿌렸으나 그 빛조차 안개에 삼켜져, 몇 걸음 앞의 기둥조차 뚜렷한 형체를 갖지 못했다. 이런 날이면 저택의 하인들은 으레 걸음을 서두르는 법인데, 발이 젖는 것보다 무언가에 홀린다는 미신 같은 두려움이 앞선 탓이었다. 그날 오후 이서리가 짐을 정리하러 가는 길에 마주친 것은 다름 아닌 조민혁이었다.
그는 회랑 기둥에 몸을 기댄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인기척을 느끼고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안개 속에서도 그의 실루엣만은 이상하게 선명했는데, 오 년을 함께한 사람의 그림자는 눈을 감아도 알아볼 수 있는 법이라고, 이서리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이 스스로도 낯설어서 그녀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할 말이 있으신가요." 이서리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지나치려 하자, 조민혁이 그 앞을 슬며시 가로막았다. "그냥 지나가는 게 서운해서요." 그가 웃으며 말했는데, 그 웃음이 예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이서리의 속을 뒤틀리게 했다. 예전에는 저 웃음을 보기 위해 저녁마다 창가에서 그의 마차 소리를 기다렸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되었구나.
두 사람의 인연은 오 년 전, 이서리가 아직 백작가의 장녀로 대접받던 시절에 시작되었다. 자작가의 차남으로서 신흥 귀족의 한계를 절감하던 조민혁에게, 명문 이가와의 혼약은 신분 상승의 발판이었으며, 이서리에게는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허락된 다정함처럼 느껴졌었다. 그 시절 그는 그녀의 실 마법을 두고 섬세하고 우아한 재주라 칭찬했으며, 무도회 때마다 그녀의 실로 짜인 장식을 몸에 두르고 나타나 사람들 앞에서 자랑스레 소개하기까지 했다. 그때는 그 칭찬이 진심인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마주한 그의 눈빛에는 그 시절의 흔적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당신, 처음부터 다인이와 짜고 있었죠." 이서리가 단정적으로 물었다. 그 물음에 조민혁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굳이 부정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짜고 있었다기보다는, 시대의 흐름을 읽었다고 해두죠." 그의 태도는 마치 사업 이야기를 하듯 담담했는데, 그 담담함이 이서리에게는 오히려 더 소름 끼치게 다가왔다.
그 말에 이서리는 헛웃음이 나왔다. "흐름이라니, 무슨 흐름이요." "불 마법이 다시 각광받는 시대잖아요." 조민혁이 스스럼없이 답했다. "당신의 실 마법은, 솔직히 말해 하녀들이나 부리는 재주로 보이지 않겠어요? 다인은 백작님의 총애를 받는 강수련 부인의 딸이고, 게다가 불 마법사예요. 누구와 손을 잡아야 살아남을지, 그건 자명한 계산 아닙니까." 그의 말투는 부드러웠으나, 그 속에 담긴 냉정함이 오히려 더 잔인하게 다가왔다. 계산. 그가 자신을 그렇게 셈했다는 사실이, 이서리에게는 배신보다 더 씁쓸한 확인이었다.
이서리는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 년 전과 똑같은 이목구비인데, 어째서 지금은 낯선 사람의 것처럼 보이는 걸까. 사람이 변한 게 아니라, 애초에 자신이 보고 싶은 얼굴만 보아왔던 것일까. 그런 물음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으나, 입 밖으로 낼 만큼의 가치는 없었다.
"영특하시네요." 이서리가 짧게 답하며 그의 곁을 지나치려 하자, 조민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원망은 안 하셨으면 해요. 저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이서리가 그 말을 되뇌었다. "당신 입에서 나오는 말 중에 어쩔 수 없었던 건 하나도 없었을 텐데요." 조민혁의 표정이 순간 굳었으나, 그는 곧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그 회복이 너무 빨라서, 이서리는 그가 이 대화를 이미 몇 번이나 예습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말에 이서리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는데, 그 순간 그녀의 눈빛에 담긴 것은 분노가 아니라 오히려 낯선 평온함이었다. "원망할 시간도 아까워서요." 이서리가 말했다. "저는 이제 당신들의 계산에 들어 있지 않은 사람이니까, 앞으로는 서로 마주칠 일도 없을 거예요." 조민혁이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이서리는 그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 등에 대고 그가 낮게 웃는 소리를 들으며, 그 웃음의 의미를 굳이 캐묻지 않기로 했다. 다만 그 웃음이 어딘가 불안한 여운을 남긴다는 사실만은, 그녀도 부정할 수 없었다. 마치 아직 패를 다 보여주지 않은 사람의 웃음 같았다.
짐을 정리하러 뒤채로 돌아가는 길, 안개는 더 짙어져 있었고 등불의 빛도 그만큼 힘을 잃어갔다. 하녀 하나가 대바구니를 옆구리에 낀 채 지나가며 다른 하녀에게 소곤거리는 말이 이서리의 귀에 스쳤다. "실 마법이나 부리는 주제에 백작가 아가씨 노릇을 다 했으니,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거지 뭐." 그러자 옆의 하녀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려나 몰라. 저 실 마법으로 뭘 할 수 있다고." 두 사람은 이서리가 바로 뒤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걸음을 옮기며 계속 무언가를 주고받았다.
그 말에 이서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으나, 가슴 한편이 서늘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 같았고, 숨을 쉬는 것조차 잠시 갑갑하게 느껴졌다. 저택 안에서마저 이런 시선이 당연하다면, 저택 밖의 세상은 자신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 물음이 그녀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오 년 전 이 저택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는, 이 회랑을 걸을 때마다 하인들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 왔었다. 지금은 그 누구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고, 오히려 등 뒤에서 수군거림만 따라붙었다.
뒤채에 다다랐을 때, 이서리는 문 앞에 잠시 멈춰 서서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회랑을 돌아보았다. 그 끝에 조민혁이 여전히 서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자리를 떴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남긴 웃음소리만이 아직 그녀의 귓가에 맴돌고 있었는데, 그것이 단순한 여흥의 웃음이 아니라 무언가를 확신한 사람의 웃음이라는 사실을, 이서리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가 감추고 있는 패가 무엇인지,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