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대청 안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는데, 곧이어 이가의 가법을 담당하는 서기관이 두루마리를 펼쳐 읽어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겨울밤의 냉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대청 안에서, 그가 두루마리를 펼치는 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벽에 걸린 촛대의 불빛이 흔들릴 때마다 서기관의 그림자가 벽에 길게 늘어졌다가 다시 짧아지기를 반복했는데, 그것이 마치 지금 이 순간의 판결이 얼마나 부당한지를 대신 말해주는 듯했다. "장녀 이서리는 근래 가문의 명예를 해치는 비주류 마법을 사사로이 사용하였으며, 이는 백작가의 위신에 중대한 손상을 끼치는 행위로 인정된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서리는 손끝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으며, 그것이 두려움인지 분노인지 스스로도 구분하지 못한 채 그저 서 있었다. 명예. 그녀의 삶에서 단 한 번도 온전히 자신의 것이었던 적 없는 그 단어가, 이제는 그녀를 내쫓는 근거로 쓰이고 있었다.
명예라는 것이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 어린 시절부터 이서리는 그 단어를 몸에 새기듯 배워왔다. 걸음걸이 하나, 말투 하나까지 이가의 명예에 걸맞아야 한다는 잔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정작 자신이 원하는 것은 단 한 번도 그 명예의 테두리 안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단어가 자신을 내쫓는 칼날이 되어 돌아오다니. 이서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서기관의 목소리는 이어졌다. "이에 따라 이서리는 오늘부로 이가의 호적에서 제외되며, 평민으로서의 신분을 부여받는다. 아울러 자작가 차남 조민혁과의 혼약은 파기되었음을 공표한다." 그 대목에서 이서리는 자신도 모르게 조민혁을 돌아보았는데, 그는 시선을 마주치는 대신 소매 끝을 만지작거리며 딴청을 부렸다. 한때는 그 손이 자신의 손을 잡아주기도 했다는 사실이, 지금은 우스울 정도로 멀게 느껴졌다. 언제였던가, 정원에서 함께 걷던 그 봄날, 조민혁은 이서리의 손을 잡고 벚꽃이 지는 것을 아쉬워한 적이 있었다. 그 손이 지금은 이토록 필사적으로 자신을 외면하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이렇게도 쉽게 방향을 바꾸는구나, 하고 이서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을 탓할 힘조차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근거가 뭡니까." 이서리가 겨우 목소리를 냈다. 냉소적이지도, 애원하지도 않은 그 짧은 물음에, 대청 안의 시선들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 시선들 속에는 동정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호기심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마치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보러 온 사람들처럼, 하인들과 방계 친척들의 눈이 반짝였다. 이서리는 그 시선들을 하나하나 마주하며 생각했다. 이들 중 누구도 진심으로 나를 위해 나서줄 사람은 없구나.
아버지 이정헌 백작은 상석에 앉은 채 미간을 좁히며 대답 대신 곁에 선 강수련을 바라보았고, 강수련은 그 시선을 넘겨받아 대신 입을 열었다. "근거는 차고 넘치지요. 뒤채 하녀들이 증언한 바로는, 아가씨께서 야밤에 몰래 저택을 빠져나가 수상한 자들과 접촉했다더군요." 강수련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했는데, 그 차분함이 오히려 이 모든 것이 미리 준비된 대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듯했다. 그 말에 이서리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는데, 그것이 어머니를 빼돌린 오늘 밤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트집을 잡기 위한 억지인지 순간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어머니를 빼돌린 일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이서리는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더 큰 죄를 자백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강수련의 표정에는 확신보다는 시험하는 듯한 여유가 담겨 있었다. 저 여자는 아직 정확한 것을 모른다. 그저 무언가를 밤에 저질렀다는 소문만 붙잡고 몰아붙이는 것뿐이다. 이서리는 그렇게 판단을 내리고서야 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건 근거가 아니라 소문이지요." 이서리가 곧바로 반박했으나, 강수련은 콧방귀를 뀌며 손에 든 부채를 접었다. "소문이 곧 명예를 무너뜨리는 세상 아닙니까, 아가씨." 그 말을 하는 강수련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는데, 그것이 이서리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얄미운 표정으로 보였다.
그 순간 다인이 끼어들어 웃음기를 감추지 않은 채 말했다. "언니, 그러고 보면 언니는 늘 뒤에서 뭔가 하고 다녔잖아. 이번엔 딱 걸린 거지." 다인의 목소리에는 오래 묵은 앙심 같은 것이 배어 있었는데, 그것은 단순히 오늘의 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자매로 자라오는 동안 쌓여온 무언가였다. 이서리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이 모든 절차가 이미 오래전부터 짜여 있었다는 확신이 서서히 굳어지고 있었다.
파혼과 신분 박탈, 그 두 가지를 한날한시에 발표할 준비를 마쳐두었다는 것 자체가, 이것이 즉흥적인 처분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서기관이 들고 온 두루마리는 이미 며칠 전부터 작성되어 있었을 것이고, 조민혁의 파혼 통지 역시 자작가와 미리 조율이 끝난 사안이었을 것이다. 누군가 미리 각본을 써두었구나. 그 생각에 이서리의 시선이 자연스레 조민혁과 다인 사이를 오갔다.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애써 다른 곳을 보고 있었는데, 그 어색함이 오히려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설마 저 둘 사이에도 무언가가 있었던 것일까. 그 의문이 스치는 순간 이서리는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조차 그런 것을 궁금해하고 있다니, 스스로가 우스웠다.
"이서리." 아버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부름에 이서리는 고개를 들었으나, 아버지의 눈빛에는 딸을 향한 최소한의 미안함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귀찮은 일을 어서 끝내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부로 너는 이가의 사람이 아니다. 남은 짐을 정리해 사흘 안에 저택을 떠나거라." 그 명령은 짧았으나 그 안에 담긴 냉정함은 이서리가 지금까지 겪어본 어떤 매질보다도 아팠다.
그 명령에 대청은 다시 조용해졌고, 서기관도 두루마리를 조용히 접어 내렸다. 촛불 하나가 유난히 크게 흔들리며 그림자를 벽에 던졌다가 사그라들었다. 이서리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시선들 속에서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붙잡았다. 이 억울함을 그대로 삼키지는 않겠다는 것. 명예를 되찾아야 한다는 것. 그 다짐이 서는 순간,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두 다리에 힘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몸을 돌려 대청을 나섰다. 등 뒤에서 다인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으나, 이서리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대청 문을 나서는 그 순간,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그 바람 속에서 이서리는 어쩐지 이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