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폐적영애의 해방

1화

왕도의 겨울은 유독 길어서, 사람들은 첫눈이 내리기도 전부터 벌써 봄을 그리워하는 습관이 있었다. 상인들은 화로 앞에서 봄에 팔 옷감을 미리 재단했고, 아이들은 아직 오지 않은 눈사람을 상상하며 뜰을 뛰어다녔으며, 노인들은 겨울이 짧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그러나 이가(李家)의 뒤채에 갇혀 지내온 이서리에게는 그런 계절의 순서 같은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뒤채의 창은 볕이 잘 들지 않아 사계절 내내 서늘했고, 그 서늘함 속에서 그녀는 시간을 세는 대신 숨소리를 세는 법을 배웠다. 열두 해 전 어머니가 쓰러진 그날부터, 그녀의 시간은 저택의 낮과 밤이 아니라 어머니의 숨소리로 흘러갔다. 숨소리가 고르면 하루가 무사히 지나간 것이었고, 숨소리가 옅어지면 그날 밤은 뜬눈으로 지새워야 했다. 그 숨소리가 옅어질 때마다 이서리는 손끝의 실을 조금 더 단단히 감아쥐는 버릇이 생겼는데, 처음에는 단순히 손을 움직여 불안을 견디려는 짓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버릇은 곧 그녀의 재능이 되었다. 실을 짓는 마법. 명문가의 핏줄에게는 부끄러운 재주라 했으나, 그녀는 그 재주로 문의 잠금을 풀고, 창의 틈을 넓히고, 밤마다 감시의 눈을 피해 다니는 법을 익혔다. 처음에는 겨우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실 한 올을 뽑아내는 데도 반나절이 걸렸으나, 지금은 눈을 감고도 자물쇠의 결을 읽어낼 수 있을 만큼 능숙해졌다. 그러니 오늘 밤, 뒤채의 낡은 자물쇠 하나가 소리 없이 열리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 한소영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딸의 손을 붙잡았는데, 그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이서리는 못 본 척했다. 열두 해 동안 병이 어머니의 몸에서 앗아간 것은 살과 온기만이 아니었다. 한때 왕도에서 손끝의 자수로 이름을 날렸던 그 손은 이제 뼈마디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고, 그 뼈마디를 이서리는 자신의 손으로 감싸 쥐었다. "정말 오늘이니, 서리야." 어머니가 낮게 묻자, 이서리는 담요를 마저 여며주며 짧게 답했다.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어요." 그 말에 어머니는 더 묻지 않았다. 지난 세월 남편의 무관심과 애첩의 냉대 속에서 서서히 말라가던 그녀에게, 이제 와서 도망칠 이유를 되묻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서리는 자신이 짜온 실을 창밖으로 늘어뜨려 어머니의 몸을 감싸고, 뒤뜰의 담장까지 조용히 끌어내렸다. 실은 그녀의 손끝에서 뻗어 나올 때마다 희미하게 빛을 냈다가 곧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는데, 그 빛이 새어 나갈까 봐 그녀는 몇 번이고 숨을 죽였다. 담장을 넘는 동안 어머니의 몸이 실에 매달려 흔들릴 때마다 이서리의 심장도 함께 흔들렸으며, 그 과정에서 손바닥이 벗겨지고 실밥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도 이를 악문 채 소리를 삼켰다. 손끝에서 배어난 피가 실을 타고 흘러 어머니의 옷자락에 얼룩을 남겼지만, 지금은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마차는 이미 담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마부석에는 오랜 세월 이가를 지켜온 집사 박천수가 앉아 있었다. "아가씨, 늦었습니다." 그가 낮게 말하자, 이서리는 어머니를 마차에 밀어넣으며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박천수는 두 사람을 도운 유일한 어른이었는데, 그가 왜 위험을 무릅쓰고 이 일을 돕는지 이서리는 굳이 묻지 않았다. 묻는 순간 그 이유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도 중심가의 고급 의류점, 정혜숙의 가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정이 넘어 있었다. 거리의 가스등은 드문드문 켜져 있었고, 그 불빛 아래로 마차의 바퀴 소리만이 골목을 울렸다. 정혜숙은 미리 약속된 대로 문을 열어두고 두 사람을 맞아들였다. "이 손끝의 레이스라면, 백작가 부인들도 줄을 서서 사갈 겁니다." 정혜숙이 한소영의 손을 살펴보며 말하자, 어머니는 오랜만에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이서리가 지난 십이 년 동안 거의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마차 사고로 위장된 죽음, 그것이 어머니에게 주어진 새로운 신분이었다. 정혜숙은 이미 짜맞춰진 서류를 내밀며, 어머니가 이제부터 왕도 외곽의 작은 마을에서 자수 일을 하며 살아갈 것이라 일러주었다. 이름도, 얼굴도, 심지어 걸음걸이까지 바꾸어야 한다는 말에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 끄덕임이 너무나 담담해서 이서리는 오히려 마음이 아렸다. 이서리는 그 웃음을 눈에 담으며, 이것으로 됐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머니는 이제 안전하다. 그 생각만으로 밤새 떨렸던 손이 겨우 잠잠해지는 것을 느끼며, 이서리는 새벽이 오기 전 다시 저택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그녀는 몇 번이나 되물었다. 이것으로 끝난 것일까. 어머니를 빼내는 것으로 자신의 몫은 다한 것일까. 그러나 그 물음에 답이 나오기도 전에, 저택의 정문이 가까워질수록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예감이 목덜미를 스쳤다. 그러나 해방이란 것은 언제나 다음 문 앞에 새로운 자물쇠를 걸어두는 법이었다. 이서리가 뒤채로 숨어들기도 전에, 저택의 정문 쪽에서 요란한 마차 소리와 함께 하인들이 술렁이는 기척이 들려왔으며, 그녀는 담장 그늘에 몸을 붙인 채 그 소란의 정체를 살폈다.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방금 전 어머니를 빼낸 긴장의 잔재인지, 아니면 이 새로운 소란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인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대문을 지나 들어서는 것은 자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였고, 그 뒤로 이가의 하인들이 무언가 커다란 종이 두루마리를 받쳐 들고 뒤채가 아닌 본채 대청으로 향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자정이 넘은 시각에 저런 행렬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되었구나, 라고 이서리는 순간 직감했다. 아버지가, 오늘 무언가를 발표하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자작가의 문장이 등장한 이상 좋은 일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먼저 들었다. 대청 앞에 이르렀을 때, 그녀를 가장 먼저 맞은 것은 배다른 여동생 이다인의 웃음이었다. "언니, 마침 잘 왔네. 안 그래도 언니가 없으면 재미없을 뻔했는데." 다인이 손끝에 불씨를 만들어 장난스레 튕기며 말하자, 그 옆에 선 조민혁이 애써 시선을 피했다. 두 사람의 나란한 자세가 이미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으나, 이서리는 그 뜻을 정확히 알기도 전에 대청 안쪽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오늘부로, 장녀 이서리의 신분과 혼약을 정리한다." 그 한 문장이 대청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고, 이서리는 자신의 두 다리가 그 자리에 뿌리박힌 듯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꼈다. 방금까지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있던 손끝이 아직 아려왔는데, 그 아림 위로 또 다른 종류의 통증이 겹쳐 왔다. 이서리는 숨을 들이켰으나 그 숨이 목 끝에서 걸려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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